여래20년 여래문집

[이여솔]법산 이백철 원로교무, 교단 난제해결에 헌신한 혈심주인

고세천 2013. 11. 10. 00:19

法山 李百徹 원로교무
교단 난제해결에 헌신한 혈심주인

[1000호] 1999년 02월 12일 (금) 이원조기자
역사를 정리해보면 드러나는 몇사람보다 그 드러난 몇사람을 받쳐주며 손발이 되어 묵묵히 일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조용히 세월의 변화를 지켜보며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염원해주는 선진들…. 어쩌면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있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후진들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다가도 본래의 궤도를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올해로 원불교와 인연이 된지 꼭 60년이 되었다는 대봉도 법산 이백철 원로교무(73세). 法山법사는 원기24년 13세의 나이에 대종사님을 뵙고 그 위용에 반해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몰래 대종사님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지만, 쌀을 조리질하는 일이 어쩐지 쑥스러워 돌아갔다가 다시금 대종사님 문하에 들어온 때가 원기26년. 그때부터 총부에 있는 열다섯개 부엌마다 다니면서 불을 때는 불목하니로 출가보은의 삶을 시작했다. 아울러 대종사님을 가까이서 뵈옵고 꾸중과 칭찬을 들으며 주세불의 가르침을 직접 받드는 소중한 기연이 됐다.

『교조이신 대종사님으로부터 정산종사, 대산종사, 좌산종법사에 이르기까지 역대 주법을 모시고 받들 수 있는 홍복을 누렸다』는 法山법사는 원기26년 출가이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교단사의 현장에서 묵묵히 실무를 맡아 봉직하면서 보은의 길을 걸어왔다. 그중 큰일 몇가지를 짚어보면 남한강 사건 수습, 서울보화당 건물건, 전무출신 용금제 도입, 영모묘원 이전, 영산 제2방언 공사, 중앙수양원 부지 확보, 성주성지 구도지 성역화 등의 일이다.

남한강사건 수습시 건설현장 전무로 임명받고 대종사님 영정이 모셔진 방에 가 기도를 하면서 「제게 지금 보은할 기회가 왔습니다. 힘을 주소서」하며 종명에 따랐던 일, 그후 현장에서의 물난리와 데모꾼들과의 실랑이, 영하 4~5도를 넘나드는 방에서 추위보다는 흉한 꿈에 시달려 ?山종사님께 말씀드리고 기도생활을 시작한 일, 그리고 일을 마무리한 뒤 등기처리한 서류를 ?山종법사님께 올렸던 일 등을 통해 法山법사는 사은님과 진리의 호념하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교단적으로 전교역자가 사흘 밤낮을 울고 한마음으로 뭉쳐 해결함으로써 교단의 저력을 보였던 남한강사건이 그동안 부분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서술은 됐지만 전체적인 기록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교단사의 바른 기록을 위해 당시 교정원장이던 상산종사님을 비롯해 관계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남한강 백서만큼은 나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또 재무부 근무당시 총부에 주재하는 교무들이 필요한 물품을 주문해 쓰던 제도를 개인적 상황을 고려해 중산 정광훈 선진의 발의로 인근 기관에 부탁해 기금을 모아 약간의 용금을 주어 쓰도록 함으로써 전무출신의 용금제도를 처음 도입해 제도화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영모묘원 이전 작업을 맡아 알봉에 모셔져 있던 선진들의 묘를 대산종법사의 뜻을 받들어 인근지역을 다 뒤져서 현재의 영모묘원으로 이장하고 터를 다듬은 주인공. 『그 일을 하면서 불구부정의 이치를 체질화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지금이야 수태극 산태극의 드문 묘역으로 극찬을 받지만 황무지를 바라보며 그 가능성을 찾아내 인정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옳은 일, 해야 할 일이었기에 심장병을 얻으면서까지 이뤄낸 투지가 있어서 아홉선진님의 묘를 영모묘원으로 모실 수 있었고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오늘의 영모묘원이 있게 된 것이다.

어느 곳에서나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지만 인과에 대한 공부를 통해 『난 지어놓은 복은 없었는가 보다』고 회고하시는 法山법사는 지난해 정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원음방송국 등에 정재 1천5백여만원을 창립성금으로 기탁했다. 특히 교단의 어려움 속에서 정산종사를 받들어온 法山법사는 성주성지 구도지 성역화에도 혈심을 다했으며 가족들도 정산종사와 인연이 맺어지도록 한 것이다.

출가수도의 길을 오로지 보은일념으로 살아왔지만 法山법사는 전무출신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고뇌한 일이 있었다. 교단 최초의 아동복지기관인 총부보화원 총무로 근무하던 시절, 집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다 물품관리를 책임맡아 시내를 왕래하다 어느날 먼발치로 어머니와 어린 딸 여솔이가 나무 해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어린 딸아이가 치맛자락에 솔방울을 주워담아 오는 모습을 보고 法山법사는 그만 눈물을 훔치며 어금니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년만에 보화원을 나와 교화현장을 자원해 발령을 받아 갔다.

『저도 사람이예요, 보화원에는 구호물품등이 풍족한 편인데 인정상 내 가족이 헐먹고 헐입고 있는 것을 보니 하나라도 주고싶은 유혹이 나는데 내가 더 있으면 그 유혹을 떨쳐내지 못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차라리 안보이는 곳으로 가기로 결심을 한겁니다』

法山법사는 평생토록 넉넉함과는 거리가 먼 청백리의 삶으로 일관해왔다. 그래도 그 어려움을 다 극복하고 어머니와 정토회원이 함께 공부심을 놓지않아 법사의 위에 올라 전무출신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게 됐고, 「사심없이 교단에 바치면 가족도 잘되게 돼있다」는 소신대로 2남1녀중 차남(이종화 교무)과 딸(이여솔 교무)이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전무출신해 현재 교정원 부속실과 감찰원사무처에서 그 임무에 충실하고 있다. 한때 방황을 하는 큰아들(이종석 교수, 원광보건대)을 데려다 혼을 내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는 속정깊은 法山법사는 정재를 교단사업에 내놓을때도 전무출신의 길을 도와준 어머니와 정토회원, 그리고 모든 가족들의 이름으로 인연을 맺어줌으로써 깊이 묻어뒀던 정을 표현했다.

평생 아닌 것은 못보는 강직함과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청렴함, 몸은 천하의 뒤에서서 일하고 마음은 천하의 앞에서서 일하는 전무출신의 길을 일관해온 法山법사는 만65세 되던 원기76년 정년퇴임해 현재 원로원에서 부지런히 수행적공 하고 있다.

정법과 스승, 회상과 진리의 든든한 배경이 있기에 교단에서 필요한 곳이면 좋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였고, 어려운 일을 할 때 사심없이 협력해주었던 선후진 동지들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용기있게, 정성을 다해 살았다는 법산법사.

물론 선진자로서 요즘의 교단분위기를 볼 때 걱정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주법을 향해 오체투지로 신성을 바칠 수 있는 교단의 원로들이 있고, 문제를 꺼내 해결의 실마리를 긍정적으로 방향잡아가는 후진들이 있기에 우리 교단의 전망은 밝다고 한다. 다만 꼭 당부할 것이 있다면 『정통정맥·대의명분·공명정대 이 세가지를 지켜가는 것』이라고.

현재 원로원에서 「적멸궁 안주, 단전토굴 생활」로 낙도를 즐기시는 법사는 새벽 3시30분이면 일어나 선보와 기도생활로 하루를 연다.

기자와의 대담 중에도 교단사를 함께 해온 선후동지들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法山법사는 원로원의 낙도생활 중에도 놓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마음공부」. 그래서일까? 법사님을 뵈면 언제나 생생한 기운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