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과 일본의 역사학적 관계조명
남원과 일본의 역사학적 관계조명
남원문화원 정리
실상사와 호국불교
백두대간의 정기와 지맥이 힘차게 남으로 뻗어내려와 지리산에 뭉쳤는데 실상사(實相寺)터는 지리산에서도 정기를 한 곳에 모은 명당 자리로 꼽힌다.
사방의 봉우리로 꽃잎을 삼고 그 안에 연통처럼 자리잡고 있어 실상사(實相寺)라 한다.
실상사(實相寺)는 신라 흥덕왕 3년(828년)에 洪陟國師(홍척국사)가 구산선문(九山禪門)(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산하면서 창건한 최초의 선종사찰이다.
홍척국사는 당나라 智藏(지장)선사로부터 선종의 법을 이어받고 귀국해 선불교를 널리 포교한 뒤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실상사(實相寺)가 세워진 이후로 한국불교를 교종과 선종으로 대별하게 됐으니 실상사(實相寺)는 구산선문 일파의 수장이라기 보다는 한국 선불교의 개창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선문이 지방호족의 도움으로 개창하였지만 실상사(實相寺)만 왕실의 두터운 귀의를 받은 것은 억불숭유 정책이 펼쳐지던 조선중기에 칙명으로 실상사(實相寺)를 중창한 것과 더불어 시사하는 바가 있다.
또한 임진.정유재란 당시에는 승병을 일으켜 민족 수호의 일익을 맡았고 이즈음 불교개혁기에 선우도량과 불교대학을 세워 불교의 사상적 흐름을 선도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선우도량 상임대표 도법(道法)(도법)스님은 "실상사(實相寺)는 민족사상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사원의 발굴복원과 사상적 재조명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며 "선불교가 가장 생명력있게 살아있는 곳이 한국이라면 실상사(實相寺)는 한국의 불교와 중생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사상의 선도자라는 의미와 함께 실상사(實相寺)가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화순(和順)의 雲住寺(운주사)와 함께 國土裨補(국토비보)의 비밀을 간직한 곳이라는 점이다.
실상사(實相寺)는 철제여래좌상, 일본열도가 새겨진 범종 등 갖가지 호국전설과 함께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지맥을 막으려던 민족주의적 풍수사고가 깃든 사찰이다.
통일 신라 때에도 변함없이 왜구가 남해안과 전라도 일대에 노략질을 일삼았다고 한다. 이에 홍척대사는 도선에게 부탁하여 절터를 알아보고 있었는데 현재의 실상사 약사전 자리에 절을 세우지 않는다면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는 말을 듣고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런 글을 읽어보니 다시금 쳐다보게 된다. 참 예쁜 칠성각 건물도 놓치면 안될 것이다.
실상사는 호국불교의 상징이랄까? 약사전 안엔 철불(보물41호) 이 모셔져 있는데 정말 지리산 천황봉을 바라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 후지산이 지리산 천황봉을 훔쳐보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기가 빠져나간다고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그 일직선상 되는 곳에 철불을 세운 것이다.
황산대첩비
조선 건국 12년전. 고려 우왕 6년(1380) 8월. 왜적이 경상도 여러곳을 짓밟고 남원 인월역에 진을 친다. 3도 도순찰사를 맡은 이성계가 남원 여원치를 넘어 운봉에서 적과 대치.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적장 '아기발도'를 쓰러뜨리고 승리한다. 이 전투에서 흘린 왜적들의 핏물로 바위가 빨갛게 변했다는 피바위가 전설로 남아있다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을 말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한성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조선 수군의 대 활약상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文禄・慶長の役)이라고 부르며, 두 차례의 전쟁을 각각 ‘분로쿠노에키(文禄の役)’, ‘게이초노에키(慶長の役)’라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당시 명나라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만력동정(萬曆東征), 임진왜화(壬辰倭禍), 만력의 역(萬曆之役),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5]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정유재란
일본은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2월 14만 1,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략했다. 명나라도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5만 5,000명의 원군을 보내왔다. 이때 조선군의 전선 동원병력은 3만 명으로 권율부대를 대구 공산에, 권응수부대를 경주에, 곽재우부대를 창녕에, 이복남(李福男)부대를 나주에, 이시언(李時言)부대를 추풍령에 각각 배치했다. 7월초 일본은 주력군을 재편하여 고바야가와[小早川秀包]를 총사령관으로, 우군은 대장 모리[毛利秀元] 이하 가토·구로다 등으로, 좌군은 대장 우키다 이하 고니시·시마즈[島津義弘] 등으로 편성한 뒤 하삼도를 완전 점령하기 위해서 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등을 점령한 후 구례를 거쳐 전병력으로 남원을 총공격했다. 이에 이복남· 이춘원· 김경로 지휘하의 수성군은 격전을 벌였으나 수의 열세로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약탈을 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9월초 충청방어사 박명현부대는 여산·은진·진산에서 일본군을 공격했고, 이시언부대도 회덕에서 일본 좌군을 격파했다. 그리고 정기룡(鄭起龍)부대는 고령에서, 조종도(趙宗道)부대는 황석산성에서 일본 우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했다. 9월 5~6일 권율· 이시언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해생(解生) 지휘하의 명나라 연합군은 직산에서 가토군·구로다군을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고니시군은 순천, 가토군은 울산으로 후퇴하여 농성했다. 그해 11월 명의 형개가 4만 명의 병력을 3로로 재편하자 조선군도 이시언· 성윤문(成允文)· 정기룡이 각각 1영(營)씩 지휘하여 남진을 시작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 사적 제272호
사적 제272호.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1597년(선조 30) 화의의 결렬로 재침한 일본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28일부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조선·명 연합군도 남원을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의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의 군사 3,000여 명이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8월 13일 일본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동문은 양원, 서문은 모승선(毛承先), 남문은 장표(莊表), 북문은 이복남이 지켰다. 14~15일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16일에 중과부적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50기(騎)를 이끌고 탈출했으나, 접반사 정기원(鄭期遠)·이복남·오응정·김경로·신호·임현, 통판 이덕회(李德懷), 광양현감 이원춘(李元春)·진안현감 마응방(馬應房)과 명군 이신방(李新芳)·장표·모승선 등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성을 방어하던 병사와 주민들 1만여 명이 전사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했고, 1612년(광해군 4)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8충신을 제향했다.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1971년에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1979년 완공했다.
1. 정유재란의 발발
임진년 이후 왜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심유경(沈惟敬)은 왜군과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본영에 들어가 화의를 종용하였다. 이로부터 2, 3년 동안 몇 차례 일본과 명나라 사신이 왕래하였으나 사신 심유경이 중간에서 일본의 요구가 명나라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였다. 후에 이 사실이 드러나게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게 반발하고 이로 인해 그는 조선을 다시 침략할 것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게 된 동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4만여 대군을 조선을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때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조선의 수군에 없는 틈을 타서 간계(奸計)를 써 원균의 함대를 다대포(多大浦)와 칠천양(漆川梁)으로 유인 전멸시켰다. 이 싸움에서 전에 이순신이 정비해 두었던 모든 전함이 완전 파괴되었고, 원균을 비롯하여 전라우수사 이덕기(李德祺),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이 전사하였다. 이에 기세가 오른 일본군은 7월 28일부터 행동을 전면 개시, 우끼다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고 고니시 유기나가를 선봉으로 하여 조선의 전지역을 총공격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은 경상도를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2.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
명나라에서 온 구원군은 전라도와 충청도를 왜군의 공격으로부터 보존하려면 전라도의 문호인 남원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많은 병력을 남원성에 주둔시켜서 왜군의 공격을 차단함으로써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남원을 수호하기 위한 당시 우리나라 정부의 전략은 어떠하였는가. 남원에는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있었다. 선조 30년 2월에 도원사 권율이 경상도 대구에서 머물면서 남원의 병기를 대구로 보내게 한 일이 있었다. 이는 남원지역이 임진왜란 때 피해를 당하지 않아 대구에 상총통을 보낼 정도로 병기가 넉넉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원성의 수비 여하에 따라 영남과 호남이 좌우되는데 병기를 대구지역으로 보내도록 명령한 조치는 정부의 적극적인 남원성의 방어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다른 문헌 기록들을 살펴볼 때 명나라의 구원군이 남원에 오기 전에는 교룡산성을 중심으로 한 방어 계획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당시 정부의 남원성 수비 계획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원성의 수비는 명나라에서 구원군으로 왔던 양원(楊元)의 군대에 의해서 전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양원은 서울을 떠나 전주를 거쳐서 6월 13일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남원성 내에 있는 용성관에 남원성을 지키기 위한 작전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주에 도착한 양원은 순찰사에게 모든 읍에 있던 군졸과 군마를 남원성으로 모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양원이 남원에 도착한 뒤에는 지금까지의 남원성을 지키려는 계획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교룡산성의 군량과 군기를 남원성에 운반하고, 남원성에만 전력하라는 작전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양원의 계획에 비변사의 관료들은 산성과 부성은 기각지세( 角之勢)에 있으므로 두 성을 다같이 지켜야 된다고 누차 말하였으나 명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양원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산성의 수호 계획을 파기하고 남원부성의 수호 계획만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 것이다. 이처럼 양원이 오기 전에는 남원의 방어 계획은 산성 중심이었는데, 양원이 온 후에는 부성 중심이 되었다.
3. 남원성 싸움의 전개
조선의 관군과 명나라 구원병이 왜군과 직접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은 왜군이 남원에 대부분 도착한 정유년 8월 13일부터이며 남원성이 함락된 8월 16일까지 싸움이 계속되었다.
전투 첫날인 13일은 왜군의 대부분이 남원성 주위에 도착하여, 공격부대를 결정하고 남원성을 포위한 뒤 포위망을 좁히려고 공격을 했지만 이에 대해 조선 관군과 명군이 진천뢰, 승자총 등을 계속 적을 향해 쏘아대 포위망을 좁힐 수 없었다. 그 뒤 소수 병력으로 조선 관군과 명군을 교란시켰다. 이는 전력을 미리 파악하기 위하여 교대로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인 공격을 한 것 같다. 전투 이틀째인 14일은 왜군이 대 토목공사를 일으켜 공격준비를 하였다. 왜군은 또한 남원성을 공격하고 병력의 시위를 하였다. 조선 관군과 명군은 왜군의 공격으로 인하여 성첩의 수비병이 많이 죽었기 때문에 사기가 위축되었으며 인심은 흉흉하였다. 게다가 양원은 항상 자기 자신만을 과시하면서, 무모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관군과 명군에 있어 인적 물적 손실과 사기의 위축만을 초래하였다.
15일의 싸움은 낮에는 왜군의 대규모 공격이 없었고 산발적인 공격만 있었다. 한편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양원에게 빨리 성을 비우라는 연락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양원은 왜군의 이러한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이러한 양원의 강경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남원성이 포위된지 며칠 안되어 조선 관군과 명군의 사기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런데, 밤에는 왜군의 공격이 성을 함락시킬 정도의 대규모 공격은 아니었으나 매우 치열하였다. 이처럼 왜군의 공격이 심해지자 성안에 있던 군인이나 민간인들의 사기는 더욱더 저하되었다.
남원성 싸움 마지막 날인 16일, 일부의 왜적은 풀과 논의 볏짚을 베어 민가의 타다 남은 담벽에다 수없이 쌓았으며 나머지 일부의 왜군은 성안에 있던 조선 관군과 명군을 공격,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였다. 양원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전주에 여러번 구원요청을 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이날 밤 성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양원은 도망가 버렸다. 이 싸움에서 조선측은 장군, 의병, 군졸 및 부민이 거의 다 전사하였다. 명군 역시 중군 이신방을 비롯해서 천총 장표와 모승선을 잃게 되었으며 군졸 또한 대부분이 죽었다. 왜군은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승을 보고하고, 이틀동안 성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한 뒤에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4. 남원성 함락의 원인
병력 무기 수성준비 등의 남원성의 내적 요인과 지리적 관계, 외부의 지원 여부, 정부의 조처 등의 외적 요인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내적인 요인을 보자.
첫째, 남원성의 수성장(守城將)인 양원의 수성준비(守成準備)의 소홀과 무모한 작전 때문이었다. 양원은 수성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산성까지 파기시켰다. 또한 8월 14일에도 필요 없는 작전을 전개하여 병력의 손실과 사기만을 저하시켰다. 이처럼 양원은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즉흥적인 작전을 일삼았다.
둘째,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왜군은 56,800여명이었는데, 아군은 4,300여명에 불과하였다. 또한 부민(府民)까지 합쳐도 왜군이 10여배나 많았다. 이처럼 현저한 병력의 차가 있었기 때문에 아군이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병력뿐만 아니라 무기에 있어서도 조총 때문에 아군은 왜군에 대한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셋째, 아군의 사기는 극히 저하된 반면 왜군의 사기는 왕성하였다. 아군은 도망자가 속출하였지만 왜군은 병력, 무기 등의 모든 면에서 아군보다 우세할 뿐만 아니라 생사를 가리지 않는 주종관계가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기가 충전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외적인 요인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첫째, 아군은 지리적 지형, 지물의 장점을 이용하지 못했다. 양원의 지시에 의해서 교룡산성을 파기하고 남원성에서 왜군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부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조정대신도 물론 포기상태였다. 또한 적의 진로를 차단하지도 못했다. 숙성령(宿星嶺), 율치(栗峙)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공격하지도 않았으니 지리적 이점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전투시 성밖에서의 지원이 없었다. 남원성은 산성이 아니라 야성(野城)이므로 적이 성을 공격하는데 성벽 외에는 장애물이 없다. 산성이 파기된 이후의 남원성은 공격하는 왜군의 입장에서는 전혀 공격의 어려움이 없었는데 구원병은 한명도 오지 않았다.
셋째, 정부의 소극적인 수성의지(守城意志)로 임시방편의 조치만 취하였다. 남원의 중요성만 말하면서 명군을 보낸 후에는 오로지 그들에게 의지하고 관전하는 상태였다.
5. 정유재란과 남원성 싸움의 관계
남원성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충청도와 전라도가 붕괴되었고 또한 서울까지 민심이 동요되어 세자와 중전이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와 같이 남원성 싸움은 남원 지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조선 전체가 붕괴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매우 중요한 싸움이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남원이 함락된 후 양호의 인민은 왜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붕괴되어 흩어집니다. 또한 열읍의 수령이 곳곳에서 도망가거나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직로 수백리되는 곳까지 무인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같은 기록은 남원성의 함락으로 전라 충청도가 붕괴되어 무인지경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각 읍현의 수령까지도 도망가 버렸음을 말하고 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연장으로 조선이 크나큰 피해를 당한 전쟁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만약 조선 정부가 남원의 수비를 좀더 강화했었더라면 이 전쟁은 쉽게 끝나고 피해도 많이 줄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남원은 정유재란에서 지리적 심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원성을 함락 당하자 조선 관군과 명군의 연합군은 힘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만인의 총
▶ 만인의총은 정유재란(1597년)때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민, 관, 군 1만여 의사들의 호국의 얼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곳이다.
▶ 임진왜란(1592년)때 호남을 범하지 못하여 승전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왜적은 1597년 11만 대군으로 다시 침략의 마수를 뻗쳐 전라도를 침공키 위하여 적의 우군은 전주성을, 좌군과 수군 5만 6천명은 남원성을 공략하였다.
조정에서는 남원성을 사수하기 위하여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1천여의 군사와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3천병사로 하여금 남원성을 지키게 하였다.
▶ 적은 8월 12일 남원에 당도하여 성을 겹겹이 포위하였으며 13일부터 16일밤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주민 6천여명을 포함한 1만여 의사들은 혈전분투하다가 장열하게 모두 순절하였다.
▶전쟁이 끝난뒤 피난에서 돌아온 성민들이 시신을 한 무덤에 모시고 1612년(광해4년) 충렬사를 건립, 전라병사 이복남 등 8충신을 모셨으며, 1653년(효종4년)에는 충열의 사액이 있었고 1675년(숙종원년)에 남원역뒤 동충동으로 이건한 후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에 들러 허술한 묘역을 보고 이장을 검토하도록 하여 1964년 남원 시 군민들이 현위치에 이전하였다.
사적 제 102호였던 이곳은 이전으로 해제되고 지금은 사적 제 272호로 지정되어 있다.
▶ 만인의총의 정화사업은 1974년부터 호국선현 유적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과 전도민의 정성어린 헌수로 1979년 정화를 마치고 충열사에는 50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만인의총에서는 매년 9월 26일에 만의의사 순의 제향을 드리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 왜군의 남원성 공략 작전도
이 작전도는 정유재란 당시(1597)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던 왜병 가와가미 후사구니가 그렸던 것으로 그간 일본 가고시마겐 도서관에 묻혀있던 것을 최근 정유재란시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 장군의 11대손인 이가정문(일본거주, 문학박사:정유재란시 왜군이 볼모로 데려갔던 이복남 장군의 셋째아들 이성현이 가문의 뿌리를 찾기 위해 60여년간의 노력으로 찾아낸 자료다.
▶ 충렬사 본전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신 정기원 접반사와 이복남 전라병마사등 50여 충신의 위패와 의롭게 싸우다가 순국하신 1만여 무명용사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 성인문
만인의총의 내삼문으로 정면 3칸, 측면2칸, 한식맞배기와 지붕이며 솟을 삼문으로 3량 굴도리 집이다.
▶ 충의문
만인의총의 외삼문으로 정면 3칸, 측면2칸 한식맞배기와 지붕이며 평삼문으로 5량 굴도리 집이다.
▶ 만인의총 정화기념비
1979년 10월 만인의총 정화를 마치고 고 박정희대통령께서 내리신 마지막 휘호이다.
▶ 정황부조
남원성 전투의 최후결전장을 묘사한 것으로 전라병사 이복남 장군이 죽음을 맹세하고 진두 지휘하는 장면이며, 나이어린 손공생이 구례 현감 이원춘을 따라 최후까지 전쟁에 참여하는 장면이다.
▶ 8충신 사적비 및 이전비
충렬사의 연혁 및 접반사 정기원등 10인의 충렬을 추모한 비와 만인의총 이전 경위와 남원성민의 장렬한 순절을 기린비
▶ 기념관
정유재란때 남원성에서 왜군 5만6천명과 혈전 분투하는 전황기록화 4폭(1600호)과 충신들의 실기행록과 유품등을 전시하고 있다.
▶ 아군의 병사행차 위용 -1597년(선조 30년) 8월 12일 전화 연염이 하늘을 덥고 전운이 깊어지자 전라병사 이복남은 조방장 김경노와 교룡산성 별장 신호등의 장수와 임사미등의 장수 50여명를 포함한 수백명의 병력만을 거느리고 적이 이미 성밑을 포위하고 있는 가운데를 병사행차의 위용을 갖추고 이병사는 유연히 마상에 앉아 남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고 이있다.
▶ 적의 공격과 아군의 반격 -1597년 8월 14일 전황
작전 2일째 8월 14일 적이 계속 공세를 취하여 오니 성의 동남쪽을 지키던 수병이 많이 전사하게 되었다. 12시경 적이 총과 포를 쏘면서 돌진하여 오니 그 소리가 뇌성벽력같고 총탄이 우박 치는 듯하니 이복남, 신호, 김경노 등은 곧 병력 천여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제치고 나각을 불며 초요기를 흔들면서 진격하니 그 함성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다.
▶ 적의 협상요구를 거절하는 아군 -1597년 8월 15일 왜구의 군사 5명이 양원에게 뵙기를 청하니 양원은 용성관 자기처소에 들어오게 하고 적장의 전황을 전달받은 양원은 내가 천하를 횡횅하였으며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전쟁이라곤 없었다고 하면서 기세 당당하니 적병사는 남문으로 돌아 갔다.
▶ 아군의 최후전투 상황 -1597년 8월 16일 작전
구례현감 이원춘은 흑각 별장궁을 휘어서 십발 개중으로 쏘아 죽였는데 덤벼드는 적과 싸우는 광경을 바라보던 부하 군사들은 적중으로 뛰어들어가 장렬하게 싸웠으며 나이어린 손공생도 인궤를 끝까지 간직하고 이현감의 뒤를 따라 최후 일각까지 분절하다가 순절하였다.
남원(南原)은 협계태씨(陜溪太氏)의 고향(故鄕)이다
남원(南原)은 진진방태(陳晉房太)의 고장(故場)이다
협계태씨의 근원과 고향은 전라도 남원이다.
우리 조상들은 정유재란에 남원성을 지키다 대부분이 전사하여
오늘날 협계태(太)씨는 희성이 되었다.
협계태씨(陜磎太氏)는 조선(朝鮮) 선조(宣祖)때 팔충신(八忠臣)을 낸 집안이다. 선조 25년 정유재란이 터지자 태귀생은 이순신장군의 측근에서 보필했다. 태색은 집안의 종친(宗親) 여러분과 가복(家僕)을 동원, 출전하여 전라병사를 이복남과 명나라 양원을 도와 군량 3백 석을 조달하는 등 공을 세웠으며, 정우재란때 집안의 종친인 우,, 상문, 천생, 팔회, 윤주 등이 함께 출전하여 같은 날 모두 장열하게 순절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장렬히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주검조차 수습치 못하고 만인의총에 합장되었다. 조국의 쓰라린 역사와 같이 했다
후에 만헌 정염(丁焰)은 일문팔충은 고금에 드믄 일이라고 칭송하여 시를 지어 기렸으니, “君家兄弟古今稀 生共一門死共歸 立馬帶方城北路 龍蛇往事淚添衣”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일족은 고금에도 드문일, 살아서는 一門이루고 죽어서는 같이 갔네. 남원성의 북쪽 길에 말을 세우고. 정유년 옛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라고 했다.
협계태씨는 정유재란때 남원지역에서 세거하면서 대부분이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에서 남원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조 8충신을낸 집안입니다
남원의 정유재란시 공을 세우신 분들의 사당인 충렬사에는 협계태씨도 봉헌하고 있습니다. 우리 태씨는 나라가 위태로우면 먼저 나서서 나라을 구한 집안입니다 발해의 후예답게 말입니다
일제 강점기 남원역
근래에 남원에는 사랑만 있었지 정신은 없다."고 질타했던, 이석홍 선생을 이젠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남원하면 의례 춘향이와 광한루다. 춘향이로 상징되는 '절개와 신분차별 타파'를 남원 정신으로 말하기엔 뭔가 미흡하다. 분명 사랑스런 춘향이 만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원정신인가. 남원인이라면 정유재란의 통한(痛恨)이 서린 '만인의총'을 기억해야 한다. 만인의총은 '만인의 순국정신'이다. 국난을 당해 온 몸을 던져 남원(나라)을 지켰던 '만인'이 바로 남원정신이다. 7년간의 전쟁인 임진왜란은 1592년에 발발한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의 끝자락의 전쟁이다.
임진왜란의 패전을 호남의 곡창지대를 점령치 못한 것으로 판단한 왜군들은 이순신 장군이 모함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자 남원성으로 치고 들어온다. 그때가 1597년 8월 추석전후다. 남원성엔 조명(조선.명나라)연합군 4천명과 주민 6천명이 결집했다. 왜군의 수는 5만 6천여명이었다. 한 마디로 중과부적이다. 이때 명나라는 동문, 서문, 남문을, 조선의 이복남 장군은 북문을 각각 지켰다. 전세가 기울자 명나라 장수들은 도망을 쳤다. 오직 북문의 이복남 장군과 주민들만이 최후까지 항전하다 순국한다. 당시 많은 시체를 옮길 수 없어 북문 근처에 웅덩이를 파고 묻는다. 그게 남원역 근처에 있었던 舊만인의총이다.
남원성의 마지막 일전을 《남원 지리산 이야기》는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포위망을 뚫고 서문으로 달아났다. 조선은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남원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남원 사람들은 왜군 56,000여 명의 병력과의 싸움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끈 1,000여 명의 병사와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장수 양원이 이끈 3,000여 명의 병사와 성안에 있던 주민 6,000여 명 등 총 10,000여 명이 죽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참으로 처참한 전쟁이었고, 우세한 왜군에 굴복하지 않은 혈전이었으며, 조선인 기개가 빛난 싸움이었다."고 기록했다. 《나의 국토 나의 산하》도 "향교동에는 임진왜란 당시(정유재란)의 만인의총(萬人義塚)이 있어 1만 의병의 의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남원성 전투는 8월 14일 시작해 16일에 끝났다. 표면상 남원성 싸움은 일본의 승리였다. 그러나 사실은 남원주민들의 승리였다. 남원을 지나 전주를 거쳐 공주까지 진격하던 왜군들은 남원성 싸움에서의 치명상(부상병)으로 결국 회군하고 만다. 이로써 임진왜란은 대단원의 막은 내린다. 결국 만인의 목숨이 풍전등화 같았던 조선을 지켜냈다. 그 역사적인 자리가 바로 舊남원역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은 일제(1931년)는 그 터에 철로를 깔고 남원역을 만든다. 정유재란의 패배를 철저히 보복키 위한 의도적인 만행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후손(우리)들은 남원역을 마구 짓밟고 다녔다. '무지가 죄'라고 했다. 아무 것도 모르니 그저 멍청할 수밖에 없다.
만인의총과 만인정신을 《남원의 삶과 문화》(2호)는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만인총화'(萬人總和)다. 계층, 성별을 벗어나 혼연일체가 된 총화의, 만인총화 결집이다. 위급한 위기상황에서 신분이나 계층, 성별이나 나이를 뛰어넘어 한 몸 한뜻이 되어 이를 극복해낸 정신과 행동의 표상이다. 4천 군사가 남원성을 지킨 것이 아니라 1만 여의 민중이 하나가 되어 향토와 국가를 지킨 것이다. 둘째는 '사수정도'(死守正道)다. 죽음으로 정도를 지켜낸, 사수정도의 신념과 용기이다. 목숨보다 고귀한 생태적 본능이 또 있을까마는 정도를 지키려는 신념 앞에서는 그 목숨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는 단합된 의지의 표본이다. 하물며 전쟁보다 더 큰 부도가 또 (어데) 있을 것이며 그것이 국가와 향토를 탈취하려 함에랴. 세 째는 '패역승결'(敗逆勝結)이다. 패배를 승리로 일구어낸, 패역승결의 귀결이다. 남원성 전투에서 남원성민들은 졌다. 그러나 남원성의 패전은 끝내 정유재란의 승리로 승화시켰다. 만인이 목숨을 던져 국가를 건져 올린 것이며 죽어서도 죽지 않은 넋이 가장 고귀한 결실로 꽃핀 것이다. 네째는 '국방자주'(國防自主)다. 외세 의존에의 결과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제나라 제향토를 지키는데 지휘부까지 남의 나라에 넘겨준 방위의 결과는 수장이 도망가 사형당한 결과를 초래하였고 관군이 지키던 북문만 끝까지 남아 최후의 전장이 되어 만인순절로 산화했다. 이 어찌 오늘의 거울이 아니랴. 끝으로 '망역망국'(忘歷亡國)이다. 역사를 잊으면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정유년 패전만으로 그 한을 씻을 수없다. 그런데 다시 조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일제는 남원성 전투의 원한을 그 현장에 보복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나라를 빼앗겼고 역사를 잊지 않은 일본은 그 자리에 남원역을 만들어 순국의 영령을 짓뭉갰다.
지난 2004년 8월, 남원역이 신정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다. 舊남원역을 민족역사교육의 성지로 만들어야 한다.《남원의 삶과 문화》(2호)는 "남원시민들이 선열의 뜻을 이어 계승하려는 우국충정과 만인정신은 늦었지만 남원역을 이전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만인정신을 계승한 남원시민은 한겨레 모두의 뜻을 모아 이 역사의 현장을 복원하여 민족교육의 성지로 발돋움 시켜야 한다. 그리고 민족적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현장으로 만들어야 할 역사적 책임과 의무를 부여 받았다."라며 "동학농민군 주둔지였던 교룡산성에서 현재의 만인의 총을 잇고 만인의 총 본무덤과 남원역에서 용성관 자리인 용성초등학교, 동헌이 있던 옛 군청, 그리고 남원성 남문 자리였던 남문 사거리에서 일제가 독립운동가 들을 고문하고 재판했던 광한루 누각까지를 연결하는 축을 만들어 민족교육의 성지순례 코스를 개발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일본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 올 추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411년 전의 추석의 비극을 어찌 풀어내야 할까. 불현듯 정유년의 전쟁을 목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참상이 떠오르는 듯해 눈시울이 붉어진다. 공교롭게도 《남원공부》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 때가 바로 추석 무렵이 아닌가. "민관군이 굳게 뭉쳐 성을 방어하였다. 결국 성이 함락되어 거의 만 명에 달하는 주민과 관군이 죽음을 맞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파괴 또한 극심하여 성안에는 겨우 민가 17가구만 남았다."는 '만인의 총 안내문안'은 내내 떠오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