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20년 여래문집

여래동기 출가 20주년 특별 인터뷰(전산 이정택 교구장)

고세천 2015. 9. 22. 14:10

광주원음방송 아침의 향기 <이야기가 있는 정원> 코너

 

게 스 트: 전산 이정택 광주전남교구 교구장,

여래동기 회장 박현덕 교무

여래기념문집 편집인 고세천 교무

광주전남교구 신창교당 주혜정 교무

방송일시: 2014128일 화 오전 10- 1030

 

 

 

 

마음은 회상에 드리고 몸은 공중에 바쳐서

세세생생 이 법륜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개인의 권리와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오직 본교를 위하여 정진하겠나이다.”

 

 

송지은:

원불교에 출가하는 전무출신 서원인들이

출가서원식날 법신불 사은님께 올리는 서원문 내용의 일부입니다.

무아봉공의 삶을 서약하고 원불교에 출가한 전무출신들이

크고 작은 삶의 경계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갈 수 있는 버팀목은

처음 출가하며 세운 그 서원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이야기가 있는 정원,

 

오늘은 개인의 모든 안락과 욕심을 놓고 원불교에 출가한

전무출신들 가운데 원기 99년 올해 출가 20주년을 맞이한

78년 학년 여래동기 교무들을 초대했습니다.

 

특히 오늘 이 시간에는 예비교무시절 지도교무로

누구보다 가까이서 78학년들을 지켜보고 큰 가르침을 준 분이죠.

 

전산 이정택 광주전남교구장님 함께 모시고

예비교무시절과 교화현장의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도 갖고

원기 100년 성업을 앞두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다짐하는 특별한 시간 되고자 합니다.

먼저 전산 이정택 광주전남 교구장님 나오셨습니다.

교구장님! 반갑습니다.

 

이정택:

반갑습니다. 원불교 광주전남교구장 이정택 교무입니다.

  


 

송지은:

78학년 여래동기 회장이시죠?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 주제정보팀

박현덕 교무 나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박현덕:

안녕하세요.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근무하는 박현덕 교무입니다.

 

 

 


송지은:

이어서 여래기념문집 편집인을 맡은

순창교당 고세천 교무 나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고세천:

반갑습니다. 순창교당에서 근무하고 있고 여래 20년 문집 책임을 맡고 있는 고세천 교무입니다.


송지은:

광주전남교구 신창교당 주혜정 교무 나오셨습니다.

 

 

주혜정:

네 반갑습니다. 신창교당 주혜정 교무입니다.

  


 

송지은:

먼저 박현덕 회장님!

올해 출가 20주년을 맞는 78학년 여래동기 교무들은

전체 몇 분이 계십니까?

  


 

박현덕:

.. 78년 동기들은 원기 74년인 1989년 서울올림픽 다음해에 입학을 하여 4년 학부생활과 1년 동산훈련원 과정을 마치고 원기 78년인 1993년에 출가식을 하였습니다. 남자가 21명 여자가 39명 해서 총 60명입니다. 특이사항으로는 남학생보다 여학생들의 숫자가 유독 많아서 지금도 여자교무님들의 힘으로 움직여가고 있습니다.

 

 

송지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 교화현장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구요.

또 국내에서도 다양한 기관에서

교화, 교육, 자선활동에 전념하고 있을 텐데요.

대략적인 소개 좀 해 주실까요?

 

 

박현덕:

출가한지 20년이 넘다보니 교당에서는 주임교무, 기관에서는 기관장을 많이 하고 있어요. 국내 교당에는 32명이 교화에 매진하고 있구요 기관에는 18명 그리고 해외교당에 7명이 나가 있는데요 미국에 김덕전, 나성인, 김현오, 독일에 이윤덕 교무, 남미 아르헨티나에 장호준 교무, 아프리카에 조현제 교무, 베트남에 한화중 교무가 나가 있습니다. 기타 3명의 교무님이 휴양 휴무를 하였습니다.

 

 

송지은:

주혜정 교무님!

78동기들의 학년이름이 <여래>인데요.

이 여래학년이라는 호칭은 어떻게 부르게 된 건지

청취자분들에게 소개 좀 해 주시죠?

 

 

주혜정:

당시 종법사님은 열반에 드신 대산 김대거 종법사님이셨는데요 입학하는 신입생마다 고유의 이름을 지어 주셨습니다. 75년 선배님들이 입학하자 삼심(三心)이란 이름을 주셨구요, 76년 출가 선배님은 제생(濟生)학년, 77년은 UR학년, 그리고 저희 동기인 78년은 여래(如來)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79년은 탄백(誕百), 80년은 대각(大覺) 이란 이름이 있습니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78년 동기교무님들이 입학했을 당시 대산종사님이 꿈을 꾸었는데 부처님들이 한무리를 지어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보통 학생들이 아니다 천여래 만보살이 될 부처님들이다라고 해서여래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합니다. 저희들로서는 과분한 이야기이지만 대산종사님이 여래동기들에게 수기법문으로 내려주신 것으로 알고 열심히 수행 적공하고 있습니다.

 

 

송지은:

. 그렇군요. 당시 대산종법사님께 학년마다

고유의 이름을 주셨는데 78동기들은

여래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큰 이름을 받고 열심히 실천할 수 있는..

정진하는 학년으로 노력하고 있는데요

이 자리에는 여래동기들이 예비교무시절

그러니까 원불교학과 대학시절이죠.

당시 지도교무이셨던 전산 이정택 광주전남교구 교구장님

나와 계십니다.

 

교구장님!

여래학년의 예비교무시절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시고

큰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셨는데요.

벌써 그 제자들이 출가한 지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제자들과 특별한 만남 갖으면서

감회가 새로울 텐데요. 소감이 어떻습니까?

 

 

이정택:

. 참으로 세월이 화살같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여래학년이 20주년이라고 하는 성년(成年)’을 맞이하는 동안 별 탈없이 교단과 기관과 각 직장에서 성장하는 가운데 교단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에 감사함을 전합니다.

 

 

송지은:

이 자리에 참석한 여래동기 교무들도

올해 출가 20주년을 맞는 소감이 남다를 거 같아요.

먼저 박현덕 회장님?

 

 

박현덕:

.. 입학하고 초임교무로 출가한지 엊그제 같은데 강산이 두 번 변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40대를 넘어 50대에 들어서다보니 교단을 보는 눈이 달른 것 같아요. 처음에는 투정도 하고 날선 비판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교단의 중진에서 지도층으로 넘어서는 감이 듭니다. 원불교가 100년이 되는 요즘 어깨가 더욱 무겁습니다. 위로 스승님들을 잘 보필하고 따라오는 후배님들을 잘 이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송지은:

. 책임감이 크고 그럴 것 같아요.

여래기념문집 편집인 맡고 있는 고세천 교무님의 소감도 궁금합니다.

 

 

고세천:

먼저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원음방송국에 감사드립니다. 원불교가 4대종교의 반열에 든 것은 방송의 힘이 크다고 보는데요. 원음방송국에서 교화에 대한 프로그램을 많이 기획하기에 오늘 여래 20년 스승님을 모신 회고담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늘 이렇게 지도교무님이셨던 전산 이정택 교구장님을 만나 옛날을 회상하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저는 1학년을 마치면서 중간에 자퇴하는 교우를 보았고 또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면서 입학했던 학생들과 헤어지고 그러면서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고민이 들어졌어요.

 

그러다가 3학년으로 복학하고 보니 지도교무님이 바뀌신거예요.. 처음 입학했을때의 기숙사 사감님은 왕산 성도종 교무님이었고 좀 있다가 교산 이성택 교무님으로 바뀌고 복학하여 마지막 전산 이정택 사감님대에서 졸업을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원불교학과에 들어와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했었죠. 지내놓고 보니까 사감님을 많이 의지했던 것 같아요.

 

학부생활 5년을 마치고 전무출신으로 출가한지 20년이 되었잖아요. 20년 세월속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나이도 어언 50줄이 되어가고요 교단에서도 1급 교무가 되어갑니다. 좀전에 동기회장님이 언급했듯이 책임감이 많이 생깁니다. 교단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힐난(詰難)하기 보다는 대안과 성과를 많이 내야 한다고 봅니다. 위로 선배님들보다 아래의 후배님들이 더 많아요.. 교단의 희망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송지은:

. 그렇군요. 이곳 광주원음방송이 위치한

광주전남교구에서 교화활동하는 주혜정 교무님

출가 20주년 소감이 어떻습니까?

 

 

 

주혜정:

네 저는 광주전남교구에서 당시 지도교무님이셨던 전산 이정택 교구장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고 있는 홍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신창교당에 주임교무로 부임하여 소규모 노인요양원과 교당을 함께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초임교무 발령부터 지금까지 두분 교무님의 말씀처럼 20년의 세월이 영화의 스크린처럼 스치고 지나가는데요 저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바쁘게만 살아온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20년의 기간 동안 무얼하고 살았는가 하는 반성도 해보고요 앞으로 남은 교역기간동안 열심히 보은봉공하며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가져봅니다.

 

 

 

송지은:

출가 20주년을 맞는 교무님들의 소감을 들었습니다.

그럼 20년 전 여래학년 예비교무시절로 좀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교구장님이 예비교무들의 교육기관인

서원관 지도교무로 처음 가셨을 때 연세가 어떻게 되셨나요?

 

 

이정택:

인생에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40대 중반 45세 였습니다.

 

 

송지은:

그러니까 지금 우리 나이였네요.

우리 나이때 사감님으로 가신거예요.

일전에 원불교 신문 대산종사를 추모하는 편에

전산 교구장님의 추모글을 접했습니다...

처음 예비교무 사감으로 부임하면서의 심경을 표시했었는데요.

실력이 곧 정성이다라는 법문의 힘으로 학림사 지도교무 4년을 역임했다고 밝히고 계십니다. 일반교화현장에 계시다가

예비교무들의 교육기관으로 발령이 났을 때 소감이 어떠셨어요?

 

 

이정택:

. 학림사 지도교무로 사령받기 전에는 원기 60년에 출가한 이래 16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교화현장에만 근무하여 교육기관에는 처음이었습니다. 약간의 설레임과 더불어 중책을 어떻게 맡을것인가 걱정이 있었지만 대산종법사님 이하 어른님들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과 더불어 인사는 공의에 따라야 한다는 심경으로 서원관 지도교무 사령을 받았습니다.

 

 

 

송지은: 네 서원관 지도교무 발령을 받고 많은

예비교무님들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여래학년을 처음 접한 소감은 어땠나요?

 

 

이정택:

. 제가 공부하던 때의 동기교무들은 교단 반백년 기념대회가 열리는 시기에 입학을 하여서 반백동이라는 별칭이 학년 이름인데 그 당시 기숙사 학생 전체에서 1/3을 차지할 정도로 숫자가 많았고 지금도 교단 곳곳에서 자기자리를 지키면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는데 여래학년들을 처음 만났을 때 꼭 저희 동기들을 떠올리게 하는 정이 들었던 학년이라고 생각이 들어집니다.

 

 

송지은:

. 그렇군요. 여래학년들과 정말 많은 추억도 많고 또 여려가지 공부하는 특별한 기회들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예비교무시절에는 남녀가 모두 단체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학교공부 뿐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수행정진 일과를 하고

특히 계절별로 훈련을 함께 나면서 심신단련을 하는데요.

박현덕 회장님! 여래학년 당시 예비교무 시절 구체적으로 어떤 일과들로 심신단련을 했는지 소개 좀 해 주시죠?

 

 

박현덕:

.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비교무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5시에 기상을 해서요 대각전에서 1시간 좌선을 하구요 6시부터 20분간 총부주위를 구보하고 각자 맡은 서원관 담당구역 청소를 하였지요. 특히 식당번인 학생들은 식당에 먼저가서 밥과 반찬도 나르고 설거지도 도와주고 그랬습니다.

 

720분부터 8시까지 아침식사시간, 그리고 학교갈 준비를 하여 9시부터 오후까지 원불교 중앙총부 길 건너편에 위치한 원광대학교에서 원불교학과 전공뿐 아니라 다양한 교양공부도 하고 저녁에는 6시에 저녁식사, 8시부터 9시까지 묵학 그리고 9시에 법당에 모여 30분간 염불, 일기, 지도교무님 훈화를 듣고 10시 취침하는 일정이었지요.

 

서원관 내에 동아리가 있어서 각자 취향대로 동아리 활동도 했구요, 일주일에 한번 봉공작업이 있어서 서원관에서 먹는 각종 야채와 먹거리를 기르는 일도 있었구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즈음에 2주일씩 하선과 동선을 낫었습니다. 남자기숙사인 학림사생들은 성지도보순례도 진행했습니다. 4학년이 되면 교무교시를 보는데 떨어지면 교무가 되지 못하는 관계로 매우 긴장되는 그런 시간을 보냈습니다. 또한 학부 4년을 마치고 동산훈련원에서 1년간 교당 교화에 필요한 실무를 익히는 훈련을 이수하고 비로소 현장에도 임하게 되었습니다.

 

 

송지은:

박현덕 회장님 지금 소개를 들으면서

저도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는데요

그렇게 빡빡한 일과를 어쩜 4년동안 잘 지키고 했는지..

중간에 여러 가지로 나태심이 나기도 했을텐데..

이런 일과속에서 득력하는 기회가 되었고 기질변화가 되는

특별한 학부시절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됩니다.

 

두 분 교무님!

그 외에 또 어떤 활동들이 예비교무 시절에 진행이 됐는지

소개 좀 해 주시죠? 먼저 교세천 교무님?

 

 

고세천:

학기중에 강연이 있었어요. 모든 학생들에게 솔성요론과 계문중에서 한가지 제목이 정해지는데 그것을 연마하여 격식을 갖추어 5분동안 발표하는 것이지요. 혹시나 잘못하면 창피를 당할 것 같아 참고서를 보고 지도교무님에게 물어보고 해서 열심히 준비했지만 막상 강연날에는 떨려서 제대로 발표를 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여름엔 하선과 겨울에는 동선이 있었습니다. 1학년 여름 하선을 만덕산에서 낫었는데요 승산 양제승 원장님을 모시고 일원상진리 강의를 받들고 오후에는 교우들과 풀도 뽑고 여름이지만 아궁이에 군불도 때고 산에서 나무도 하고 감나무 잎으로 감잎차도 만들고요 저녁에는 염불하고 숨겨둔 간식도 먹고 했었지요.

 

2학년 동선은 영산성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눈이 펄펄내리는 저녁 아궁이에 군불을 많이 때서 아랫목에는 앉지 못하고 이불을 깔고 염불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선과 동선이 지금 교무로 성장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송지은: 고세천 교무님의 훈련은 아궁이에 불뗀 추억이 제일 크네요..

네 주혜정교무님은 어떤 추억이 있습니까?

 

 

주혜정:

네 저는 2학년 가을에 있었던 부모님 모시기 행사가 기억납니다. 부모님 모시기 행사는 원불교에 이해가 없는 부모님에게 서원관 기숙사 생활을 보여드리고 성직자로서 출가한 자녀들의 삶이 일반 사회생활보다 의미있고 가치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려고 시작되었습니다.

 

실제 원불교 성직자로 출발은 하였지만 가족들의 따뜻한 환영이 아니라 부모님의 반대속에 이루어지는 예도 많이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부모님들과 가족들이 하루 동안 원불교 총부에 있는 서원관 기숙사와 지도교무님, 여러 스승님들의 훈증을 체험하고 돌아보고 가실때에는 안심하고 후원을 약속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많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따뜻해 집니다.

 

송지은:

네 그렇지요. 부모님 모시기 행사.. 부모님들이 원불교에 출가를 시키고 궁굼하기도 하고 섭섭한 생각이 있었을텐데 그 행사를 통해서.. 정말 출가시키기를 잘했다.. 이런 마음을 내기도 하고 원불교에 귀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비교무들의 지도교무이셨던 교구장님이

당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중점을 둔 부분이라면 어떤 부분일가요?

 

 

이정택:

제가 근무하기 전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무님들과 서원관에서 생활을 지도하는 지도교무님들간에 갈등이 약간 있었던 것으로 파악을 하고 결국 그 중간에 위치한 학생들이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을 같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학과공부와 사리연구 공부과목은 교수님들께 일임을 하고 정신수양 과목과 작업취사 과목에 중점을 두어 지도를 했고 특히 저 자신은 그동안 교화현장에만 살아왔기 때문에 교화현장에서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유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당시 지도교무로 처음 발령받아

여래학년들과 첫 겨울훈련을 함께 나면서

정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당시 훈련은 어떻게 진행이 됐습니까?

 

 

이정택:

아까 두분 교무님이 말씀하였듯이 그 당시 겨울방학에 실시하던 동선(冬禪)이라고 지칭하던 겨울훈련은 학년을 진급하는데 필수과목이었습니다. 그당시 여래학년은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진급하게되는 훈련이었는데 삼동원에서 훈련을 났던 기억이 있구요. 제가 맡은 과목이 고경가운데 수심결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 외에도 아침좌선부터 시작하여 강연 회화 공동작업을 비롯하여 일과를 마치는 순간까지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며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때 어느날 일과를 마무리하고 임원들과 내일 진행해야 될 과정을 점검한 뒤에 제가 숙소에 들어왔는데 아마 처음 부임한 남자 지도교무를 환영하는 의미로 금녀의 방이라는 내 숙소에 몰래 들어와 있던 미보리급 여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고 제가 놀래는 기색없이 태연하게 맞이하자 참으로 대담하다며 자기들 숙소로 돌아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또한 3학년으로 진급을 해 가지고 수학여행을 떠날 때 제가 인솔을 하게 되었는데 떠나는 날이 제 결혼기념일 이었습니다. 그리고 4학년에 진급해가지고 여래학년이 봄 소풍을 가던날도 역시 제 결혼기념일 이어서 제 결혼기념일을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여래학년들에게 빼앗겼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릅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그만큼 또 기억에 남고 추억 어린 그런 학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여래학년 예비교무들과 함께 하면서

기억에 남는 그밖에 추억들도 참 많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떠오르는 추억 몇 가지 좀 전해주실까요?

 

 

이정택: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서원관에 부임해서 생활할 때 누구보다도 먼저 일어났고 누구보다도 늦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참석하는 행사에는 빠짐없이 일일이 동행하면서 솔선수범의 정신으로 임하였고, 남학생들이 여름에 진행하게 되는 일주일간의 성지도보순례를 함께 하면서 느꼈던 어려움...

 

특히 심장병 어린이 돕기 전국 자전거 국토순례단이 활동할 때는 3334일이라고 하는 기나긴 세월을 하루가 끝나기 전까지는 가슴을 졸이면서 전화로 항상 체크를 하거나 때로는 현장을 함께 따라 다니면서 같이 뛰어다니다가 그 후유증으로 제가 B형 간염을 앓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항상 부모된 심정으로 학생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을 주려고 노력했다 자부합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교구장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비교무들이 아무 사고 없이 학부시절을 잘 마치고 교화현장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는데는 서원관(학림사, 정화원) 지도교무님들의 음덕(陰德)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예비교무들을 지도하면서

때로는 곤란하고 어려운 경계도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이정택:

. 지난번 원불교신문에 발표한데로 제가 교화현장에만 있다가 교육현장에 와서 제가 실력이 없습니다 라고 대산종법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실력은 정성이 바로 실력이다 라고 해 주신 법문을 마음속에 세기면서 하여튼 정성스럽게 임했던 것이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는 첫째가 아니었나 합니다.

 

 

송지은:

. 그렇군요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래동기 교무님들은

예비교무 시절 또 어떤 아름다운 추억과 경험들이 있는지

차례로 전해주실까요? 우리 박현덕 회장님

 

 

박현덕:

저는 신입생 훈련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1학년으로 입학하기전 당시 오리엔테이션 형식으로 4학년 선배님들이 총방장을 맡고 3학년 2학년 선배님이 방장역할을 맡아서 수도인으로 살아가는 행동을 하나 하나 가르쳤는데요 아침 5시에 일어나 심고, 좌선, 저녁에 취침하기전 까지의 일과, 걷는법, 말하는법, 남녀간의 예법등을 배웠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이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다리가 절여 힘들었던 그런 생각이 지금도 납니다.

 

그리고 서원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신앙성 이외도 다도와 족구가 생활하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모든 방에 가면 자연스럽게 녹차를 즐기고 법담을 나누는 그런 시간이 굉장히 소중했습니다. 또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오면 기숙사 앞 족구장에서 많은 경기가 있었는데 선수나 응원하는 사람이나 일체가 되어 땀흘리고 웃고 응원하면서 정적인 생활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고세천 교무님은 어떤 추억들이 있습니까

 

 

고세천:

어느 대학생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교학대학에도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입학한 신입생과 군대 제대하고 복학한 복학생, 그리고 타 대학을 졸업하고 편입한 편입생 이렇게 3가지 축으로 이루어지잖아요?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올라왔기에 어린티가 많이 났지요. 그런데 복학생 형님과 편입생 형님은 사회경험도 많아서 원숙했지요. 당시 마음에 들었던 정화원 여학생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노력을 했지만 언제나 복학생과 편입생 형님들에게 밀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군대에 가기전 방황을 많이 했는데요 염불일기 끝나고 일직이 취침했는지 확인하는 방 점검이 끝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원광대학교를 배회하다가 새벽 좌선시간 전에 들어와 실컷 졸고 갑을병정 평가때 갑이요 해서 여학생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추억도 있지요.

 

 

송지은:

그렇군요. 정말 크고 작은 아름다운 추억들... 생각해 보면 그런 웃음이 나는 추억들이 많은데요 주혜정 교무님은 또 어떤 추억이 있습니까?

 

주혜정:

. 저는 추억이 4년학부를 졸업하기전 교무가 되려면 교무고시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4학년이 되면 교무고시를 준비하느라고 바쁘게 지냈습니다. 평소에는 보지 않던 원불교전서를 외우고 선배님들로부터 교무고시에 나왔던 문제들을 뽑아 예상문제집을 만들고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방학도 없이 열심히 공부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교무고시를 마치고 여자교무님들은 남자교무님들과 달리 관례식이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추천교무님이 머리를 올려주시는데요 그 머리를 올려주실 때에는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가슴벅찬 감회가 있었고 또한 앞으로의 삶을 다짐해서 그런지 눈물을 많이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내왔는데 벌써 20년이 지나갔습니다.

 

 

송지은:

.그렇군요.. 추억도 많고 열심히 공부했고 교화현장에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고민도 많았던 학창시절과

예비교무시절을 마치고 출가 서원식을 올리고

다양한 교화현장에서 이제 20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동안 출가 20년을 돌아보면서

다양한 삶의 경험과 경계속에서 오늘에 이르렀을 텐데요.

그동안 잊지 못할 교화현장의 경험, 극복과정과 삶의 표준들을

한 가지씩만 전해주실까요? 박현덕 회장님

 

 

박현덕:

. 저는 첫 발령지를 원불교 총부 문화부로 받았는데요 제가 수행한 여러 업무중에서 가장 보람있었고 재미있었던 것이 성지순례 안내였습니다. 제가 교당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성지순례하는 그 시간이 교화다 라는 생각으로 즐겁게 임할 수 있었고 현재는 원광대학교 원불교 자료실에서 일하고 있는데요. 삶에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에게 주어진 일이 천직(天職)임을 알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교단에 보은하는 길이 되고 나에게도 보람이 될거라는 그런 확신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고세천 교무님은 어떻습니까?

 

고세천:

저는 20년의 세월동안 줄곳 교화현장에만 있었습니다. 4년의 부교무와 6년의 보좌교무시절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해외교화로서 남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당에 발령을 받아 준비하면서 세상과 교단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해외교당에 있어보니 한국과 원불교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경험되었구요. 이것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문화가족 교화를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원기 100년도가 코앞 인데요 여러 가지로 어렵고 교화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저의 공부모습이 교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데서 발생된다고 보고 반성을 많이 합니다. 교법은 참 좋다고 인정하면서도 교법의 실행공덕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은 많은 연마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래도 한국이 발전하고 있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된다는 전망품 말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다문화가족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통해 실현해 가려고 합니다.

 

 

송지은: 지금 순창교당과 아울러 순창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도 활동을 하고 계시지요?

 

 

고세천: . 그렇습니다.

 

 

송지은: 주혜정교무님은 교화현장에서 어떤 소중한 경험들이 있습니까?

 

 

주혜정:

저 또한 전주교당 부교무 생활을 시작으로 교화현장에서 20년간 줄곳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산 박정훈 법사님과 숙타원 정숙현 교무님을 모시고 살았는데요 제가 부교무 살때를 생각하면 참 힘든 경계도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들이 제 꼴을 봐 주시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생각이 너무 너무 제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평범한 것은 곧 비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평범한 가운데 교단의 한 모퉁이를 채워갈 수 있다면 그것을 제 영광과 기쁨으로 알고 살아가려 합니다. 그 가운데 크고 작은 경계속에서 마음의 힘을 얻고 단련이 많이 되어서 20년 전과 비교를 해보면 많이 성장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교화현장에서 20년을 함께 하면서 또 크고 작은 경계속에서 크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구장님! 어떻습니까?

제자교무들의 출가서원 이후 현장에서의 경험들을 들어보셨는데요.

소감과 격려의 말씀 전해주시죠?

 

 

이정택:

. 3분 교무님들 말씀을 듣고보니 참 대견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출가한 이래 40 여년간 교단 생활을 해 오고 있는데요 항상 가슴에 세기며 살아가는 표준은 소태산 여래께서 제시해 주신 신앙의 표어인 처처불상 사사불공과 수행의 표어인 무시선 무처선의 공부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살아갑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와도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화합하며 즐겁게 살아야 한다 라고 해석을 하고 무시선 무처선이라 하는 것은 어느곳에 처하거나 어느 시대를 처하더라도 내가 처한 그곳이 바로 꽃자리이며 내가 생활하는 그곳을 불국토(佛國土)로 만드는 길이 대종사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여래 동지들도 그렇게 생활하면 좋겠습니다.

 

 

송지은:

네 감사합니다. 특히 78학년 여래동기들은 출가서원 20주년을 맞아

여래기념문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구요.

실무를 맡은 고세천 교무님! 소개 좀 해 주시죠?

 

 

고세천:

올해 깃점으로 출가한지 만 20년이 됩니다. 원불교 100년사에서 20년이면 1/5입니다. 대산종법사님과 좌산종법사님, 그리고 경산종법사님이 차례로 주법에 오르셨던 원기 78년부터 98년까지 사회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이 차례로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던 시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래동기들의 20년은 원불교 교단사의 작은 줄기라고 봅니다.

 

원불교 교단사의 큰 줄기가 있다면 그 안에는 교무님 개개인의 개인사와 단체들의 연혁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냥 묻혀지지 않고 정리될 때 큰 줄기인 교단사도 바르게 정리된다고 봅니다. 여래동기 출가교역자 60명은 나름대로 열심히 성직의 본분을 다해서 살아왔습니다. 교역자 한분 한분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 원불교 신문에 보도 되었던 기사들을 스크랩 했구요 20주년을 돌아보는 여래 교무님 글과 지도교무님 회고담, 그리고 오늘 인터뷰한 것도 여래 20주년 기념문집에 수록될 것입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원기 99년 올해는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종사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입니다.

또 원불교 100년 성업이 1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올해 출가서원 20주년을 맞이한 78학년 여래동기 교무님들도

출가서원의 꽃발 신심을 되새기면서 새롭게 도약하는 한 해가

될 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앞으로 어떤 준비와 마음가짐 갖고 계신지 전해주실까요

먼저 박현덕 회장님?

 

 

박현덕:

대산종법사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올해는 경산종법사님 신년 표준에서도 대산종법사님 법문 여유와 심사와 음덕 이라는 법문을 표준삼아서 실생활에 나투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특히 제가 원광대학교 원불교 자료실에서 근무하는 관계로 원불교 자료들을 좀더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도서관을 구축하여서 대종사님의 법이 널리 보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겠다는 그런 다짐도 해 보게 됩니다.

 

 

송지은:

. 그렇군요. 고세천 교무님?

 

 

고세천:

대산종사님은 여래동기들과 인연이 깊은 부처님입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끝나는 즈음에 반드시 종법사님에게 인사를 갔었습니다. 유명한 영묘모원 비닐하우스 응접실에서 예비교무들을 맞아 다과도 주시고 법문도 내려주셨던 큰 스승님이셨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여래(如來)라는 이름도 내려주셨구요. 대산종사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스승님의 유업인 진리는 하나 세계도 하나 인류는 한가족 세상은 한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 법문을 실현해 가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송지은:

네 주혜정교무님은 올해 어떤 좋은 계획 마음의 준비 하고 계신지요?

 

 

주혜정:

네 저는 교당과 요양원을 운영하고 있다 보니까 교당교화발전 계획과 요양원 발전을 중점으로 하는 것이 교단 발전과 같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교당은 원기 99, 100, 1013개년 계획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교당 교화발전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요양원 또한 실다운 면모를 갖춘 요양원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송지은:

네 그렇군요. 교구장님!

오늘 출가서원 20주년을 맞이한

여래동기 제자교무들과 특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래동기 많은 교무들에게

당부의 말씀 전해주실까요?

 

 

이정택:

. 앞서서 3분 교무님들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금년은 대산종사님 탄생 100주년인데 제가 좋아하는 대산종사님 법문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급히 말고 쉬지 말고입니다.

 

이 말씀은 서두르지도 말고 중단하지도 말라는 내용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다 보면 여래위에 근접하리라고 생각하면서 여래 동기교무님들도 학년 이름에 걸맞는 여래행을 하기 위해서는 급히 말고 쉬지 말고 이 말씀을 보감(寶鑑) 삼아서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보살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드립니다.

 

 

송지은:

네 고맙습니다. 여래동기 교무들의 출가 20주년을 축하하고

처음 출가할 때의 그 서원 되새기면서

교단의 큰 버팀목이 되고 알뜰한 주인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좋은 시간 고맙습니다.

(이정택, 박현덕, 고세천, 주혜정 모두 인사)

  


 

<이야기가 있는 정원>

오늘은 원불교에 출가한 지 올해 20주년을 맞이하는

78학년 여래동기 교무들이 예비교무시절 지도교무인

전산 이정택 광주전남 교구장님 모시고 특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