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박석교수 - 문명 전환과 명상에 대하여

고세천 2013. 4. 8. 15:04

문명 전환과 명상에 대하여

 

문명의 위기와 새로운 방향의 모색

현재 우리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문명은 근대 서구 문명이다. 근대 서구 문명의 핵심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물질적 생산 능력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진시켰으며 자본주의는 화폐의 힘으로써 오랫동안 인류를 억압해왔던 출생 신분중심의 계급 구조를 해체시킬 수 있었다. 과학 기술과 자본주의의 위력은 실로 막대하여 짧은 시간 내에 유럽을 세계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아울러 그 위력은 빠른 속도로 전세계로 파급되어 왔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근대 서구 문명은 이렇듯 인류의 삶에 커다란 빛을 던져주었지만 이와 아울러 부정적인 문제도 많이 남겨놓았다. 먼저 자본주의는 귀족과 농노라는 기존의 신분질서를 해체하였지만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와 그것을 가지지 못한 프롤레타리아라는 새로운 계급을 낳았으며 이에 대한 반발로서 사회주의가 탄생하였다. 사회주의의 탄생 이후 사회의 변혁을 꿈꾸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본가에 의한 착취 구조를 타파하고 분배의 평등을 실현하는 데에 주된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분배 정의 문제에 못지않은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팽창과 과학 기술의 무분별한 남용으로 인한 환경파괴, 자원고갈 등의 문제이다. 신분 계급 타파니 분배의 정의 등의 문제가 인간들 사이의 문제라면 이것들은 인간과 자연과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 인류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재화를 창출할 것인가 내지는 그렇게 해서 창출된 재화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여왔지, 재화 창출의 근원인 자연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가고 상처받아 왔는가에 대해서는 간과하고 있다가 늦게서야 서서히 문제의 심각성을 깨우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당장 심각성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서서히 인류 전체를 고사시킬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물질 문명의 편향된 발전에 의해 야기되고 있는 정신적 황폐함도 점차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중이다. 20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인류의 삶을 한 차원 더 끌어올리기 위하여 기존이 사회 변혁 운동보다 더욱 근본적인 차원에서 문명전환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환경운동, 공동체운동, 신과학운동, 영성운동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까지는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사회운동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사회운동의 양상이 점차 다양화되어 가고 있다. 특히 환경운동이 시민운동의 중대한 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괄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 외 아직 소수이기는 하지만 공동체운동, 신과학운동, 대안교육운동, 영성운동 등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고 기존의 사회변혁 진영에 속한 사람들도 시간이 흘러갈수록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수용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추세이다.

 

 

의식혁명이 관건

현 문명이 가지고 온 위기에 대한 진단과 처방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서 물질적 능력과 정신적 능력의 괴리 현상을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진단된다. 따라서 의식혁명이 가장 중요한 처방책으로 제시되고 있다.

물질적인 능력이란 자연을 보다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조작하여 거기서 인간에게 필요한 이익을 추출하거나 인간의 삶에 편리를 주고 감각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거나 그것을 관리 유지하는 능력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과학기술력과 생산 시스템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회구조를 효율적으로 관리 유지하기 위한 여러 가지 부차적인 지식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능력이다.

 

 

이에 반해 정신적인 능력이란 이 세계의 실상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있는 삶인가 등에 대해 제대로 사유할 줄 알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말한다. 즉 올바른 세계관과 인생관 및 가치관을 세우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여러 가지 훌륭하고 고매한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제적으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정신적인 능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물질적인 능력과 정신적인 능력의 괴리가 심각하고 위험한 적은 없었다. 이 말은 지금 사람들의 정신적인 능력이 이전의 사람들보다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옛날 사람들도 대다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기 중심적인 좁은 세계관과 눈앞의 감각적인 쾌락만을 쫒아가는 근시안적 인생관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옛날에는 물질적 능력 또한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사이에 괴리는 별로 없었던 데 비해 지금은 물질적인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약적으로 증가한 데 비해 정신적인 능력이 너무나 답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물질적 능력이 낮은 상태에서는 탐욕이나 무지 때문에 기를 쓰고 주변 사람이나 환경에 피해를 입힌다고 하여도 그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물질적 능력이 높은 상태에서는 약간의 실수만 해도 주변사람이나 환경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가할 수 있다. 지금의 인류 문명은 마치 정신 연령이 낮은 어린아이에게 장난감 총이 아닌 진짜 총을 맡겨놓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 오로지 군사적 힘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아무런 대책 없이 수많은 생명을 살상하고 환경을 초토화시키는 핵무기를 경쟁적으로 개발해왔고 오로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대규모로 생태계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킨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해오지 않았던가?

 

 

지금의 문명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소수의 뛰어난 사람들을 위한 심오한 수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 내재는 실천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차원에서 자연과 서로 교감할 수 있고 물질적 이익과 정신적 가치를 조화시킬 줄 알며 부분과 전체를 유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이 제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가장 대중적인 차원에서 인류의 정신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 종교이다. 그러나 현재의 종교는 크게 두가지 문제점을 않고 있고 하나는 아직도 기복 차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교간의 갈등 문제이다. 종교간 갈등은 물론 역사적, 문화적, 민족적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세계관의 충돌과 관련이 있다. 한 종교에서 주장하는 세계관이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세계관과 큰 차이가 있을 때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세계관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고 다른 종교의 세계관은 거짓이라고 믿게 될 때 그 갈등의 폭은 더욱 증대된다.

 

 

이 두가지 문제를 극복하지 못할 때 종교는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제고시켜주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심각한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인들의 의식 수준이 향상되어야 하고 후자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단 종교간의 대화도 필요하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각 종교가 지니고 있는 세계관의 모순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집단 주관적 착각에서 나온 것이다. 집단 주관이란 개인적 주관이 아니라 집단 전체가 공유하는 주관이라는 뜻이다. 개인의 주관적 인식은 그것이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그것이 주관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지만 집단 전체가 공유하는 인식은 그 속에서는 객관적 인식으로 비치기가 쉽다. 특히 집단의 규모가 매우 클 때는 그것은 더욱 절대 객관적인 진리로 인식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집단 밖에서 볼 때 그것은 절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집단 주관적인 착각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인류가 믿고 있는 고등종교의 세계관은 대부분 고대 사회에 형성된 것으로서 본격적으로 문명권 사이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근대 사회 이전에는 제각기의 문명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속한 문명권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바로 세계 전체였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지구 전체가 하나의 마을이 되어버린 지구촌 시대에 물질과학의 영역은 지구촌 어디서나 통용될 수 있는 객관적인 진리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지만 정신세계, 특히 종교의 영역은 여전히 자기가 속한 종교의 진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인식하는 관행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즉 집단 주관을 절대 객관으로 여기는 착각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좀 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관점에서 인류의 의식혁명을 촉진하는 그 무엇이 필요할 때이다.

 

 

명상이 의식혁명을 촉진하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서의 명상은 심신을 체계적으로 수련하여 특정한 의식 상태로 이끄는 수련체계를 총칭한다. 명상법은 대체로 힌두교나 불교 등의 인도 종교권에서 많이 발달하였지만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의 유일신교에서도 각각 까발라, 관상법, 수피즘 등이 독특한 명상 수련 체계가 갖추어져 있고 심지어 중국의 유가나 도가 등의 사상가들에게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로 보아 명상은 특정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신 수련의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명상은 종교의 핵심이었다. 대부분의 위대한 종교가들은 명상을 통하여 우주적 진리를 체험하였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종교를 창시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많은 제자들은 명상을 통하여 그들의 스승이 체험하였던 그 세계에 가까이 가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명상을 비법이라고 생각해 그것을 일반 사람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았고 오직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전수하였으며 그것도 대부분 구전으로 전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과거에는 명상법이 매우 비의적(秘儀的)이고 까다로워서 일반 사람들은 따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보다 대중적인 가르침으로는 경전이나 예배 의식을 따로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명상은 소수의 전문 구도자들 사이에서 독점되어 왔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여러 가지 비의적 명상법들이 점차 과학화되고 대중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동서문화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양 사람들의 동양의 명상 세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점차 증가하게 되면서 명상의 대중화와 과학화를 부채질했다. 유일신교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는 서양의 종교에 비해 개개인이 내면의 진리를 자각하는 것을 더 중시하는 동양의 종교가 아무래도 명상적인 분위기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명상의 세계는 고원하고도 심오한 세계였다. 명상의 효과는 눈으로 알 수 없으며 명상을 통해 얻은 높은 경지도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추측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명상의 세계는 종교와 바로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막강한 권위가 부여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명상의 세계는 항상 신비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이자 탈신비화의 시대이다. 과학의 위력은 명상의 세계에까지 점차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명상의 원리도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중이다. 과학의 힘은 명상을 대중화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최근 미주에서는 명상법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안정을 가져다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논문과 실험결과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여러 명상법들을 권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업체에서 사원들의 작업능률 향상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하여 명상법을 권장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근래에 들어서 명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명상이 대중화되고 과학화되는 것은 인류의 의식혁명을 위해서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명상은 인류의 정신적 능력을 빠른 시간에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명상 세계에서는 내면의 깊은 세계를 파고들어가 마침내 불면의 궁극적인 의식을 체험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지금까지 대부분의 명상가들은 일상 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깊은 산중에서 혹은 사막에서 혹은 폐쇄된 수도원에서 명상에만 전념해 왔다. 나 또한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깊은 산중에서 무기한 단식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은 그렇지 않다. 진정한 깨달음은 내면의 주관적인 체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검증되어야 하는 것임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삶이란 나 혼자만의 주관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주변 사람들과 더불어 공유하는 객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즉 내면의 주관성과 외면의 객관성이 서로 중첩되어 있는 것이다. 내면과 외면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삶은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고 깨달음도 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정 기간 자기의 내면에 깊이 파고드는 것은 보다 성숙된 삶을 위해서는 분명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 자기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명상이 내면 세계의 각성만을 추구하는 차원에 머물러 있을 경우 명상 인구의 확대는 사회 변혁과 문명 전환의 도구가 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면의 의식 세계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농후한 기존 명상의 세계는 현실의 왜곡을 직면하면서 개혁하려는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보다는 모든 것을 개인적, 내면적 문제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오히려 왜곡된 현실의 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구도에 관심이 있거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정신없이 굴러가는 가운데 피곤한 몸과 마음을 깊은 휴식과 안정을 주기 위해서 명상을 찾는다. 그러나 명상 속에는 단순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문명적 차원의 대안이 숨겨져 있다. 우선 명상속에는 내면과 외면을 조화시킬 수 있는 요소가 있다. 명상은 기본적으로 자기 내면의 세계를 성찰하고 그 속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는 것을 중시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지나치게 외면적 가치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외면을 바라보느라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 볼 기회가 없었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태도는 개인을 병들게 할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한다. 이제는 명상을 통하여 끊임없이 외면적 가치만 추구하던 바쁜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야 할 때이다.

 

 

또한 명상은 인간과 자연의 교감을 중시하고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자본주의 문명은 기본적으로 자연을 정복의 대상, 이익 추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그 결과 환경파괴라고 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환경문제는 온 인류의 문제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명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관념적으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많은 환경운동가들이 명상을 중시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명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앞의 두가지와도 관련이 있는 문제인데 타율적인 윤리 도덕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자신의 욕구를 한 차원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키워준다는 것이다. 이 욕구의 자율적인 조절이야말로 자본주의 문명의 폐단을 극복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욕구의 자율적 조절 문제는 결코 고원한 성자의 경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보통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초인적인 금욕이나 무욕의 경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욕구 조절 능력을 말한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물질적 욕구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필요한 수준을 넘어서는 거품 욕망이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재화에 대한 욕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문명이다. 그리고 그 밑바닥은 감각적 쾌락과 편리함에 대한 욕구이다.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인륜는 자연을 이용하여 재화를 창출할 수 있는 수단을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그것은 인류의 물질적 복지의 증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거품 욕망들이 계속 늘어나면서 최근에 들어서는 환경오염과 자원고갈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많은 미래학자들이 지금과 같은 규모의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원을 낭비할 때 수 십년 내에 인류의 미래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리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생이 탐욕적인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계속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부추기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비판적으로 그것을 좇고 있다. 그렇게 해서 생산된 부는 일부 계층에게만 편중되고 비만과 기아의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한 나라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지구촌 전체의 문제이다.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미국 사회에서는 ‘비만환자’가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사람마다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반면 선진 자본주의 제국들에 의해 수탈당한 제3세계에서는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기아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비 정상적이고 왜곡된 거품 욕망은 인류문명의 미래를 위해 하루 빨리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욕구의 자율적인 조절은 바로 환경운동, 영성운동 등과도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적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것을 추구하는 명상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분명 도움을 줄 수가 있다. 돈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는 사회, 말초적인 감각과 쾌락을 위주로 하는 문화가 주류를 이루는 사회, 분초를 다투는 치열한 경쟁속에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성찰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사회 이런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정신없이 끌려가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전반적인 의식 수준이 바닥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사회정의 뿐만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해서도 우리의 의식 수준을 하루 빨리 제고시켜야 할 것이다. 명상은 우리의 의식 수준을 제고시키는 데 분명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박석 "문명 전환과 명상에 대하여," 『대안, 새로운 지평을 연다』,(상명대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