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영광군에 있는 원불교 영산성지의 소태산 대종사 대각지는 원불교 교주인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곳이다. 영산성지에는 대종사 생가와 깨달음을 얻은 노루목, 영산선학대학, 최초의 교당 등이 있다. [사진 원불교]
소설가 정도상 기고 | 교조 소태산의 생애와 사상
금강경 읽고난 뒤 원불교 열어
내장사 나오며 '절 밖이 절' 선언
소태산은 누구인가? 솥에서 태어났으며 원불교를 열었고, 마음공부를 시작한 성자이며 부처이다.
◆소태산, 솥에서 태어나다=모악산 기슭의 금산사에는 거대한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에 들어가면, 삼층 건물 높이의 장대한 미륵이 우뚝 서 있다. 어찌나 큰 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미륵의 발치로 가면 어마어마한 가마솥이 있다. 금산사의 미륵은 솥에서 태어난 부처였다. 어찌하여 미륵은 솥에서 나왔고, 솥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혁(革)은 옛 것을 버리는 것이요, 정(鼎)은 새 것을 취하는 것이다. 새 것을 취하여 그 사람에 맞게 하고, 옛 것을 바꾸어 법제가 정돈되고 밝아진다. 정이라는 것은 변화를 완성하는 괘이다. 옛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취하는데 성현이 없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솥은 날마다 밥을 해내는 생명의 도구이다. 밥은 곧 생명이다. 한솥밥을 먹어야 비로소 식구가 되듯이 솥은 공동체의 운명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의 백성들은 솥을 빼앗긴 상태로 살아야 했다. 솥이 있다고 하더라도 음식을 끓여내지 못한다면 이미 그 솥은 빼앗긴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백성들은 새로운 솥을 갈구했다. 그 갈구의 현상이 미륵이며 동학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박중빈 1891~1943)는 20여 년의 구도와 고행 끝에 깨달음을 이뤘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정신은 지금도 이 시대의 소중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은 1891년 5월 5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촌마을에서 박성삼과 유정천의 사남이녀 중 삼남으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나던 날 그 어떠한 천지조화의 징조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게 태어났다. 1891년은 고종 28년으로 수운 최제우가 득도하여 동학을 창시한 지 30년이 되는 해였다.
조선 후기의 팍팍한 삶 속에서도 아이는 자랐고, 일곱 살이 되자 대자연의 변화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세계의 비밀을 묻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계의 비밀을 알아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문자나 텍스트에 기대지 않는다. 그들은 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계의 비밀은 문자나 텍스트에 있지 않고 우주와 사물의 접힌 주름 속에 담겨 있다. 그 접힌 주름을 풀기 위해 어린 구도자는 자연의 한 복판에서 온몸으로 격투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치열한 구도 끝에 마침내 그는 우주만유가 하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고 세계의 솥뚜껑을 열고 나왔다. 그것을 일러 대각이라고 하고 솥뚜껑을 열고 나온 것을 개벽이라고 한다. 그것이 백 년 전이었다.
◆소태산, 마음공부를 전하다=수운의 후천개벽은 현실을 바꾸고자하는 혁명주의로 나아갔고, 증산의 후천개벽은 현실 밖의 신비주의로 은둔해버렸다. 소태산은 수운과 증산의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수운의 현실개벽, 증산의 천지개벽이 아닌 정신개벽을 앞세운 역사적 맥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동학은 가죽(革)이었고 증산은 시루(甑)였으나 소태산은 원불교를 솥(鼎)으로 삼고자 했다. 소태산은 부처란 현실과 아주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에 앉아 화두를 잡고 정진하다가 문득 깨닫는 것으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부처는 온전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일 때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성품자리를 보지 못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윤리적으로 완전하다고 하더라도 온전한 사람일리는 없다. 윤리적으로 훌륭하다고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태산은 “마음공부는 모든 공부의 근본이 된”다고 했다. 마음공부는 원불교 신앙의 핵심이다. 불가에서 마음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라고 가르친 선사는 달마다. 달마의 무심(無心)은 원효에게 전법되어 일심(一心)이 되었다. ‘무(無)‘는 ‘없다’라는 뜻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렇게 되어가는’ 혹은 ‘집착이 없다’라는 뜻에 가깝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의 모든 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이 나타난 것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뜻이다. 즉,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다. 앞 부처가 전한 마음을 받아 소태산은 뒷 부처가 되었다. 소태산은 마음의 체성과 작용에 대해 공부하라고 했다.
◆소태산, 원불교를 개벽하다=소태산은 금강경을 읽고 난 뒤에 석가모니 부처를 연원으로 삼아 원불교를 열었다. 원불교의 일원(一圓)은 동그라미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테두리가 없는 형상을 상징한다. 소태산이 내장사에서 나오면서 머리를 깎은 것은 ‘절집 바깥이 곧 절’이라는 선언이었다. 절집의 담장을 허물 듯이 불교의 테두리를 허물어 확장시킨 것이 바로 원불교인 것이다. 이런 내용은 소태산의 『조선불교혁신론』에 모두 담겨 있다.
소태산은 마음공부를 통해 중생의 실존이 결정론적이며 서구적인 존재(Being)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가는’ 즉 연기적 존재(becoming)가 되기를 원했다. 개벽이란 ‘Being’을 ‘Nothing’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연기적 인과의 ‘becoming’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원불교 개벽의 비밀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소태산은 원불교의 개벽이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며, 돈오가 아니라 점오며, 일거에 한꺼번에 이루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느리게 이뤄가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전면적 전환이 아니라 성찰적 전환이며, 생활 밖에서가 아니라 생활과 함께 이뤄내는 것이며, 자아를 찾는 게 아니라 마음을 공부하여 본성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누누이 말했다.
◆『소태산 평전』을 기대하며=소태산은 1943년 열반에 들었다. 일제가 전쟁의 미치광이가 되어 가장 극악무도할 때였다. 그 때 만일 소태산이 열반에 들지 않았다면, 어쩌면 지금의 원불교는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제는 소태산을 도쿄로 불러 천황 앞에 무릎 꿇리거나 일본 불교 중의 한 계파로 만들어 친일을 강요했을 것이다. 1943년 즈음에는 그것을 거부할 방편이 없었다. 그것을 예감하고 소태산은 스스로 열반을 준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소태산의 열반은 원불교를 지켜내는 순교였다고 할 수도 있다.
이제 막 중견작가인 김형수가 3년여에 걸친 『소태산 평전』의 집필을 마쳤다. 곧 출간되어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성자이며 부처인 소태산의 생애가 평전에 빼곡하게 펼쳐져 있다. 사랑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어떤 실재며 가치다.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사랑이며 진리로 소태산은 존재하고 있다. 『소태산 평전』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개벽이다.
[출처: 중앙일보] [원불교 100주년] 원불교 '개벽' 현재 진행형…정신과 물질 문명 조화 이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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