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평화

아름다운 삶

고세천 2018. 8. 6. 23:54

신과함께영화가 개봉 5일만에 6백만명이 보았다고 6일 기사가 나왔으니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관람하겠지요.. 역대 1위인 명랑을 앞지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꼭 보세요.. 영화관람료가 12,000원 합니다. 조금 비싸지요.. 포인트나 할인카드가 있어야 절약이 됩니다. 그런데도 영화 메니아들은 말해요.. 만원을 소비해서 그런 환타지나 새로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요..

 

영화는 말 그대로 영화이지요.. 우리들이 상상하고 꿈을 꾸었던 것이 현실처럼 나타나니까요.. 저는 SF영화를 좋아하는데 신과 함께는 판타지 장르에 속합니다.

 

신과함께는 우리들 무의식속에 잠재한 유불선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어요. 특히 불교와 선가 (무속)계열의 의식이 영화를 통해서 스파크가 되고 불꽃이 튀겼다고 봅니다. 이번 영화는 성주신(城主神)이 나옵니다. 성주신은 집안의 길흉화복을 지키는 우두머리 신입니다. 성주신이 깃들어 있는 영역은 대들보이지만 성주단지에 모시는 곳은 큰방 윗 선반입니다.

 

성주신은 성주단지에 머물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성주신 역에는 마동석이 나왔는데 마지막 대사가 명언입니다. 천년동안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는데 나쁜 사람은 없고 나쁜 환경만 있었다는 것이지요.

 

저도 그 대사에 동의합니다.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고 환경이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대자대비를 가르쳤습니다. 자는 자애로움입니다. 자식이 말을 잘듣고 공부도 잘하고 하면 부모가 한없이 기쁘겠지요.. 그래서 자식을 무한히 사랑하겠지요. 이것이 자애로움 대자(大慈)입니다.

 

반대로 자식이 학교에는 안가고 친구들하고 싸움하다가 경찰서에서 전화나 오고 오토바이 타다가 넘어져 병원에 실려가고 하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요.. 남의 자식이면 욕이라도 하겠지만 자기 자식이니까 어디에다 말도 하지 못하고 한없이 안타까워 하지요. 이것이 대비(大悲)입니다.

 

부처는 부모이고 중생은 자녀입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계율을 지키고 보시 적선하며 착하게 살면 흐뭇해 합니다. 반대로 살도음을 행하고 막되게 살면서 고통속에 힘들어 하면 한없이 슬퍼합니다.

 

그런데 환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인격도 상처를 받아 어긋나게 됩니다. 그 환경을 개선해 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합니다. 5천년 역사에서 유교가 500년을 치세했고 불교가 천 오백년을 지배했으며 샤머니즘 즉 선교가 3천년동안 인심을 다스렸습니다. 조선시대 500년동안 유교가 양반들의 삶을 지배했지요. 조선시대 200년은 성리학 중심이었고 중후기 300년은 예학이 세도인심을 다스렸습니다. 관혼상제 특히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는 예법은 지금도 유교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절대적이지요.

 

유불선은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습니다. 유교는 우주만유의 형상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삼강오륜과 인의예지를 가르쳐 수제치평의 길을 주로 밝혔다. 따라서 유교의 특징은 입신양명 즉 출세를 하여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 지향점입니다. 공자님은 사후세계를 중요시 하지 않았지요. 왜냐면 살아있는 현실세계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논하냐는 입장입니다.

 

불교는 우주만유의 형상 없는 것을 주체삼아서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보응되는 이치를 알아 마음 안에서 깨달음을 얻도록 가르칩니다. 특히 이조 500년 동안 억불숭유의 정책에 의해 산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부처를 깨달아 중생을 건지는 두가지 목표 중 불과(佛果)를 이루는 것이 먼저라고 보는 게 불교의 관점입니다.

 

선교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입니다. 일본으로치면 신도(神道)의 개념이지요. 신라 때의 학자였던 최치원은 난랑비서문을 지었는데 거기에 보면 국유현묘지도 왈 풍류라 하여 선교가 고조선 때부터 면면히 내려옴을 밝혔습니다. 선교는 신선놀음이라 하듯 백수건달, 한량의 삶을 지향합니다. 중국에서 말하는 노장사상이 선교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합니다. 무위자연을 추구하며 인위적인 노력보다 자연의 질서에 부합되어 살기를 추구합니다.

 

우리는 유불선 중에서 어떤 가르침을 택하여 살아가고 있을까요? 남들보다 출세하여 돈도 많이 벌고 이름도 널리 알려 유명해 지고 싶은 사람은 유교의 가르침을 삶의 지표로 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유교적인 삶의 병폐는 지나친 생존경쟁을 유발하여 정적(政敵)을 만들며 시기질투 구설수에 오르게 됩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세간의 인연을 끊고 욕심과 이해를 불고하고 삶과 죽음의 이치를 연마하며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한가하게 사는 방법도 있습니다. 지금의 불교 스님들이 사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남을 돌보지 않고 자기 한 몸만 살펴 모두를 위하는 공익(公益)적인 모습이 약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하늘의 종교인 선교의 가르침은 현대에 와서 생태학적 대안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른바 지속가능한 삶으로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동행으로 자리잡고 있지요. 자연은 인간이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는게 선교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선가의 가르침이 너무 득세하면 몰상식과 불합리에 빠져들어 미신(迷信)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원해야 할까요? 인생에는 공부 잘하여 좋은 학교 졸업하고 돈 많이 벌어 이름을 널리 알리는 유가(儒家)적인 삶의 길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돼지는 살이 찌면 죽을 날이 가까워 오고 사람은 이름이 나면 죽을 날이 가까워 온다는 옛말은 책에만 있지 않지요. 자연스럽게 이름이 드러나고 권력이 생기면 좋은 일이지만 그에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그런대로 한가로이 여유 자적하는 인생도 그리 낭비는 아닐 것입니다.

 

중국 하 은 주 시대에 강태공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도 낚시의 대명사가 강태공인데 강태공은 세월을 낚고 있었지요. 때가 되어 자기를 알아주는 무왕을 도와 은나라 주왕을 치고 천하를 제패하게 됩니다.

 

유가의 삶과 불가의 삶과 선가의 삶은 다 특징이 있고 장 단점이 있습니다. 어느 삶이 정답(正答)일 수 없습니다. 다만 해답(解答)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따라서 스스로 조바심 내고 의기소침하고 열등감만 느끼지 않으면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