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 교수의 바라보기 명상법_2
보편적인 명상법을 향하여
명상이 진정 보편적인 행복의 기술이 되려면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하나는 주관적 착각의 문제이고 하나는 삶의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이다.
1. 집단주관적 착각을 주의해야 한다
명상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현상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중에는 몸이 가벼워지거나 머리가 맑아지는 등의 보편적인 현상이 있는가 하면 특수한 현상도 많이 있다. 예컨대 단전에서 뜨거운 기운이 발생하여 회음으로 가서 척추를 타고 위로 상승하여 백회를 거쳐 다시 단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도 있고 명상 중에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찬란한 빛 속에서 천사가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이 주관적 착각인가 아니면 객관적 진리인가? 명상을 모르는 사람들은 주관적 착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관적 착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사람들은 아직 그러한 것을 체험할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단학 도장에서 비슷한 기의 체험을 하고 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 중에 비슷한 체험을 하고 있다. 혼자일 때는 주관적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체험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주관적 착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체험이 자기의 심리적인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물리적인 현실에도 구체적인 영향을 끼칠 때 그 확신은 더욱 깊어진다. 예컨대 기의 순환을 통해 자신이 건강해지고 아울러 그 기의 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치유하게 될 경우, 혹은 천사나 성모의 계시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욱 절대적인 확신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요가를 하는 사람은 단학과 전혀 다른 통로의 기를 체험하고 불교를 믿는 사람은 명상이나 기도 중에 천사를 보지 않고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 물리적인 초현상을 체험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명상을 하다가 기의 각성을 체험하거나 어떤 영적 존재가 현시하는 것은 명상의 세계에서는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물리적인 초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현상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은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가 어느 특정한 통로로 흐르는 것을 체험하거나 특정한 형태의 영적 존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은 주관적 착각이다.
이것은 마치 색안경을 끼고 어떤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붉은 안경을 쓰고 보면 그것은 붉게 보이고 파란 색안경을 끼고 보면 파랗게 보인다. 붉은 색깔과 파란 색깔은 분명히 색안경으로 인해 나타난 착각이다. 그렇지만 색안경에 나타난 그 사물의 형태마저 착각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사물의 형태가 객관적인 진리라면 그 사물을 바라보는 색안경은 주관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 중에 체험하는 특정한 기의 통로나 특정한 형상의 현시는 바로 이러한 주관적 틀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 틀 가운데는 개인적인 주관의 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주관의 틀도 있다.
우리는 개개인마다 각기 서로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주관이다. 그런데 어떠한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집단 특유의 공통된 의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집단 주관이다. 집단 주관은 인종, 민족, 종교, 문화권, 지역권에 따라 매우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 개개인의 주관은 중층적인 집단 주관의 틀 위에 형성되어 있다.
개인적인 주관의 틀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집단 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집단적인 주관의 틀은 알아차리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것을 자꾸 객관적인 진리로 착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집단 주관적 착각이다.
명상을 함에 있어서 참으로 주의해야 할 것은 집단 주관에 비친 것을 마치 절대 객관적인 진리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명상가들과 종교인들이 자기가 속한 종교권 내지는 문화권의 집단 주관의 틀을 통해 체험한 것들을 마치 절대 객관의 진리인양 착각하고 있는가?
이제는 이러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이제는 집단 주관의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자아와 세계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야 할 때가 되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 구조와 원리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진정으로 제대로 된 명상을 할 수 있다.
2.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명상을 하면 여러 가지 많은 육체적 정신적 변화가 나타난다.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며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러한 것들은 예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진정 필요한 것이지만 특히 바삐 돌아가는 일상을 좇아가느라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명상을 조금 더 깊이 해보면 보통의 상태에서는 체험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값진 것들을 체험할 수 있다. 정서적으로 고양되어 황홀감을 느끼기도 하고 삶과 우주에 대하여 깊고 오묘한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 이것들은 우리 삶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명상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명상들은 특정한 영역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한다. 이럴 경우 도리어 부작용을 낳는 경우가 많다. 간혹 특정 호흡법을 위주로 하는 명상에 너무 심취하여 도리어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명상의 세계에 심취한 사람 가운데는 일상 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도 많다.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모두 특정 부분의 효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비효율적이 되는 경우이다. 일반적으로 부분의 효율성의 증대는 전체의 효율성의 증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종종 부분의 효율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조화가 깨어지는 경우 부분의 효율성의 증대가 도리어 전체적인 효율성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올바른 명상을 위해서는 부분적 효율성과 전체적 효율성을 잘 헤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일상생활을 완전히 포기하고 명상에만 전념하는 사람들도 많다. 종교에도 전문 수도사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고독한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들은 명상의 세계에 심취되어 있기 때문에 일상의 현실 세계를 돌볼 여유가 없다. 그리하여 속세를 떠나 깊은 산 속에서 수도를 하는 것이다.
자기에 내면에 깊이 파고드는 것은 삶의 과정상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계속 자기 내면의 세계에만 몰두하고 있으면 삶의 전체적인 효율에는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 자신의 내면 세계에 깊이 심취한 사람에게는 현실로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일상의 삶을 넘어서 존재의 본질에 이르는 초월적인 깨달음만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초월적인 깨달음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내면과 외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전한 깨달음이란 내면과 외면의 삶을 전체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외면의 세계가 전부인줄 알고 그것에 끌려 다니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내면의 세계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외면의 세계를 소홀히 하는 것 또한 삶의 전체적인 효율성에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명상이나 종교의 세계에 있어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초능력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하는 사람 가운데서는 간혹 여러 가지 초능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미래를 예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거나 병을 치유하는 능력 등이 그것이다. 그것보다 조금 수준 높은 초능력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영적 에너지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초능력에 약하다. 그리하여 그들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를 한 쪽 방향으로 지나치게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전체적인 삶의 효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것을 감추고 교묘하게 자기 합리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겉으로는 이러한 능력이 별것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속으로는 그 힘으로 대중들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호도하는 행위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바로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간과하고 의식의 특정 영역을 각성시키는 것만을 중시하는 잘못된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올바른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다.
이제 집단 주관인 색안경을 벗어 던지고 여러 현상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고 삶에 대한 부분적인 시야를 극복하고 삶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자. 이러할 때 명상은 삶의 길에 있어서 진정으로 소중한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보편적인 명상법 - 바라보기
이상의 여러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새롭게 만든 명상법이 바라보기 명상법이다. 이것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으면서도 일상의 삶과 전혀 괴리되지 않는 새로운 명상법이다. 바라보기 명상법은 몸 바라보기, 마음 바라보기, 삶 바라보기로 이루어져 있다.
몸 바라보기는 기존의 수행법처럼 특정한 기의 통로나 특정한 자세를 강조하기보다는 우리 몸의 보편적인 원리에 의거하여 몸의 근육과 뼈에 적절한 긴장과 자극을 가하고 아울러 깊게 이완시킴으로써 우리 몸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 특히 자신의 몸의 긴장과 이완에 대한 느낌을 길러 평소 몸에 긴장이 쌓이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마음 바라보기는 특정한 종교적 신념을 강화하거나 정신 집중을 통하여 특정한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강조하는 명상법이다. 우리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마음 속의 여러 가지 상처들이나 왜곡된 부분들은 저절로 치유되고 교정된다. 마음 바라보기는 마음에 깊은 휴식을 줄뿐만 아니라 인격을 자연스럽게 성숙시킬 수 있다.
삶 바라보기는 자신의 삶의 흐름을 잘 관찰하여 현실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다듬는 기술이다. 삶 바라보기에서는 특히 자신의 욕망을 잘 관찰하여 그것을 효율적으로 성취할 것을 강조한다.
지금까지 대부분 명상의 세계에서는 욕망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욕망 그 자체가 원래 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리석음으로 인해 욕망이 지나치게 부풀려졌을 때 욕망은 추해 보인다. 또한 욕망을 이루는 방법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은 남을 해치고 자신을 망치는 것이 된다. 자연스러운 욕망은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삶 바라보기는 우선 먼저 자신의 욕망의 정체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아 욕망의 거품을 뺄 것을 강조한다. 그런 뒤에 자신의 삶의 흐름 속에서 그 욕망을 효율적으로 성취하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한다.
출처 : 바라보기 명상센터
'명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상이란 (0) | 2015.09.30 |
---|---|
명상 길라잡이, 박석교수 서문 (0) | 2015.09.30 |
좌망(坐忘) (0) | 2014.08.19 |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 도올 김용옥 (0) | 2014.06.19 |
명상활동이 유아성장에 미치는 영향 -김현장 교무 (0) | 2013.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