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유교, 불교, 선도)

선교의 맥은 살아있다. - 조용헌 고수기행에서 인용

고세천 2011. 9. 11. 20:31

어느 민족이든 정신사라고 하는 영역이 있다. 그 민족의 정신 흐름이 어떻게 흘러왔는가를 살펴보는 일은 그 나라 역사의 속살에 해당된다. 속살이 과연 어떤 모습인가. 속살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속살은 목욕탕에 들어가야 보이는 법이다. 사람을 보려면 겉옷만 보지 말고 속살도 봐야 한다. 속살을 보려면 시간이 걸린다. 우리 민족의 속살, 즉 정신사에 대해 일찍이 고운 최치원이 한마디 했다. 포함삼교(包涵三敎) 여기서 삼교는 유 불 선을 말한다. 포함삼교는 유불선이 모두 섞여 있는 상태다. 유교에는 예의범절이 있고 불교에는 심법(心法)의 이치가 들어있으며, 선교(仙敎)에는 양생(養生)의 원리가 들어있다. 한민족의 정신사에는 범절, 심법, 양생이 혼융되어 있고 이 혼융을 모두 볼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뿌리를 내린 이래 고려시대에 국교로 꽃을 피웠고 유교는 조선시대에 국교가 되었다. 이에 비해 선교는 한번도 국교의 자리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선교는 우리 민족의 정신사를 지탱해 오고 있다. 유불의 밑바탕에 선교가 뒷받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선교는 왼쪽의 불교와 오른쪽의 유교 가운데에서 중도 통합하고 있는 형국이다. 불교가 지니는 출세간(出世間)적 인생관과 유교가 지닌 입세간(入世間) 적 인생관을 모두 지니고 있는 것이 선교이다. 입출자재이다. 그래서 최치원의 포함삼교를 분석하면 선교가 몸통이고, 불교는 왼쪽, 유교는 오른손의 모양새로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도파가 강경 좌파나 강경 우파에 떠밀려 정권을 잡은 적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중도적인 선교는 한번도 국가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유교와 불교를 중간에서 화해시키면서 우리 민족의 심층심리 밑바닥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면 한국 사람치고 신선(神仙)을 싫어하는 사람 있는가?

 

 

한국 사람은 신선 팔자를 가장 부러워한다. 유학자들은 부처를 싫어하고, 승려들은 유생들을 싫어했지만, 신선은 한국 사람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는 모델인격으로 전승되어 왔다. 선교의 인물들은 불교의 승려들처럼 집을 떠나 산속에서 도를 닦기도 하지만 인연 따라서 세상에 내려와 자식 낳고 사회적인 의무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한국이라는 땅은 산수가 좋다. 전국의 70%가 산이다. 소나무와 바위,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몸에 좋은 약초가 널려 있는 한국의 산들은 신선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조건이다. 중동의 사막이나 열대우림에서는 신선이 배출될 수 없다. 불노장생을 추구하는 선교는 산수가 아름다운 조건에서 발달하게 되어 있다. 한국처럼 산수가 아름다은 나라도 드물다, 그런데도 선도는 역사적으로 조직을 갖춘 교단을 가져본 적이 없어 그 맥이 미미하다. 맨투맨, 즉 스승과 제자 사이의 구전심수(口傳心授)로 그 맥이 이어져 왔다. 점조직 전승법이라고 할 만하다. 그 맥을 한번 찾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