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5. 18 아픔 딛고 신앙으로 승화된 삶/ 인물탐방 농성교당 임남형(양수) 교도

고세천 2013. 10. 31. 10:38

5·18 아픔 딛고 신앙으로 승화된 삶
인물탐방 / 임남형 농성교당·서강정보대학 교수

[1380호] 2007년 05월 18일 (금) 최용정기자 chdl@won.or.kr
   
 
   
 
참회와 용서, 마음공부로 감사생활
5·18정신 장학사업으로 보은행




‘광주민주항쟁’의 그 아픔을 신앙생활로 승화시켜 사회봉사활동과 더불어 소외된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삶을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3일 오후 광주민주항쟁 제27주기를 보름 앞두고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민주묘역 정문에서 만난 임남형(본명 양수·51·농성교당·서강정보대학 교수)교도.

임 교도가 안내한 곳은 국립 5·18 민주묘지 1묘역 왼쪽 편 두 번째 줄, 둥그런 일원상 아래 임균수의 묘라고 쓰여 진 묘비 앞.

언듯 많이 듣던 이름.

“이곳이 균수 묘 입니다. 당시에는 망월동 묘역에 안장돼 있었죠.” 묘비 옆에는 조그만 임 열사의 영정도 새겨져 있었다.

‘1959년 8월 25일 생, 1980년 5월 21일 졸, 묘지번호 1-47’, 임 교도는 조선대 대학원 재학 중이던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에서 동생 균수(당시21세.원광대 한의대 본과 2년)씨를 잃었다.

“균수가 시위대열 맨 앞에 섰다가 계엄군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사고를 당한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죠. 그때가 초파일날이라 부모님은 고향인 전북 순창에 부처님 오신날 관등행사에 간 사이, 균수는 친구들과 같이 시위대에 함께 있었는데 돌아오지 않아 친구들과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틀만인 21일에 기독병원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싸늘한 모습의 균수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동생의 죽음을 알리러 가까이에 있던 누나 집으로 가다가 계엄군에 붙잡혀 상무대 영창에서 40일 넘게 혹독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임 교도는 “부모님은 큰아들인 저 마저 당하고 돌아오자 분노와 슬픔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몇 달 동안은 밖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냥 이렇게 있는 것이 죽은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균수를 위한 천도축원으로 균수의 몫으로 나온 보상금과 당신의 사재로 장학기금을 만들어 장학사업을 하시게 되었죠” 라고 말했다.

모교인 전북 순창북중고와 광주인성고에 매년 50만원의 장학금과 원광대에 100만원을 보내고 있다. 어머니 강연옥 (공타원 78, 광주교당)님은 7천만원의 정부 보상금이 나오자 ‘돈을 헛되이 쓸 수 없다’며 상가 한 채를 구입해 임대료로 장학기금을 모으고, 5년 전 5·18 유공자로 인정된 임 교도도 “부모님의 뜻을 쫓아 보상금 6천여만원을 보태 장학사업을 계속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당시 조선대 토목공학과 교수였던 임 교도의 아버지 임동명(경산 80, 광주교당)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라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놈의 군인들이 어쨌거나 그것은 두 번째고, 내 아들이 죽은 것은 먼저 내 잘못이여. 내가 그놈을 단속하지 않고 광주를 벗어나 있었던 탓이여. 내가 부주의 한 탓에 아들을 잃은 것이여. 늘 그것이 아버지로서 죄스럽고 미안한 일이야”라고, 당신의 탓으로 돌렸다 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가슴에 묻게 한 이들을 쉽게 용서하며 ‘내 탓이요’ 라고 돌리겠는가.

또한 자식들이 잘되게 해달라고 불공을 드리고 있을 때 변을 당했다면 어찌 신앙심이 나겠는가.

순창교당 교도회장을 지냈던 임 교도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인과로 돌리고 사회봉사활동 등으로 참회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임 교도는 “5·18과 균수를 통해 인과를 깨닫고, 참회하고 용서하며 보은 행으로 감사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말했다.

원광대 임균수 열사 광장을 무심고 지나쳤던 그 이름의 주인공, 이제야 누구인가를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