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불선(유교, 불교, 선도)

계타원 정형섭 대희사님이 원불교에 귀의하게 된 경과

고세천 2016. 11. 7. 13:50

계타원 정형섭 대희사님이 원불교에 귀의하게 된 경과

 

다음글은 어머님(두타원 박효진님)께서 원기77(1992)에 써 놓으신 글입니다.

 

이글에서는 항상 어머님께서 하시던 말씀과는 다른 것이 몇군데가 있으나 있는 그대로 올리오니 감안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어머님(정형섭 1877-1938 ?)은 박사시화 할머니의 연원으로 원기 20년에 원불교(당시 불법연구회)에 입교하셨고 나는 이듬해 원기21(병자년)에 어머님 연원으로 입교 하였다. 어머님께서는 본래 불교를 믿으시어 절에 불공을 올리고 새벽 송경주로 천수경을 외우시고 팔상록을 비롯하여 묘법, 연화경, 능엄경, 화엄경 등 각종 불경을 탐독하시며 스님 받드는 것을 서가모니 부처님을믿는 불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될 도리로 아시었다.

 

박사시화 할머니는 남원읍 원님을 지낸 도정궁 나리의 부인(도정궁 대방마님이라 칭함)의 수양딸로서 대방마님은 자신이 다니는 절의 불사를 위하여 권선문을 수양딸에게 주어 시주를 받아오도록 하였는바 이를 위하여 일찍부터 우리집을 드나들고 같은 구불교 신자로서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다.

 

박사시화 할머니는 위로 오빠 한분(박해산 선생)이 있고 쌍둥이 동생(공명선씨=성성원님의 어머니)을 두었는데 일찍 청춘에 혼자되어 지내다가 대방마님께서 총명하고 재질이 뛰어남을 사랑하여 수양딸로 삼으시고 옆에 시중을 들게 하였다. 종종 권선문을 가지고 각지의 양반가에 보내어 시주를 받게 하였으니 그때에 어머님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던 중 7~8년간 소식이 없어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날 집에 나타난 사시화 할머니(당시는 구 불교법명으로 박만공심으로 불렀음)를 반가이 맞으시어 이야기를 나누시는데 시주를 받으러 온줄로 알았던 사시화 할머니는 불법연구회 이야기를 늘어 놓으셨다.

어머니께서는 상당히 놀라신 듯 아무래도 사교에 빠진 모양이라면서 상대도 하지 않으려 하셨다.

 

사시화 할머니는 그래도 그간의 친분을 배경삼아 끈질기게 우리집을 자주 드나들며 나를 붙들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영광에 새 부처님이 출현하시어 불법연구회 간판을 달고 새 회상을 여시었으니 이분이 돌아오는 용화회상의 주세불이 되실 미륵부처님이라 하셨다. 이어서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을 이야기하며 이에따라 공부를 해야하며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를 열거하며 은혜를 알고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었다.

 

남녀권리 동일, 지우차별, 타자녀교육, 공도헌신자 받들것 등을 낱낱이 해석해 주시니 나는 감탄하며 "할머니는 학교도 안 다니셨다더니 그런 말씀을 어데서 배웠읍니까?"하고 물으니 모두 대종사님께서 대도를 깨치시고 새법을 만들어 새회상을 여실 준비를 하시는데 그 새부처님께서 밝혀주신 법문이라 하셨다. 그러시며 어린사람이 말귀가 트여서 잘 알아듣는다고 하시고 공부하면 잘 하겠다고 하셨다.

 

당시 나는 이미 결혼 한 몸으로 (16세에 결혼) 남편이 일본에 공부하러 가 있고 친정에 와 있는 몸이었다.

나는 절에 모신 부처님도 중하지만 인간생활에 필요한 공부법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어머님께 참 좋은 말만 한다고 말씀드렸으나 불법이 아니고 사교라고만 하시며 냉대를 하셨다.

 

그래도 어머님께서는 차비하라 하시며 꼭 돈을 주시었다. 그 후 어느날 사시화할머니는 어머님의 법명증을 가지고 오시니 어머님께서는 필요없다고 하시며 아니 받으시어 내가 받아서 서랍에 넣어 두었다.

 

이후에도 사시화할머니는 종종 오시어 어머님 시중을 들어주시고 옷도 챙겨주시고 신발도 깨끗이 닦아주시던중 어머님께서 서울을 가신다고 하시자 같이 따라 나서시며 정성스럽게 시중을 드시는 것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나도 같이 왔음) 항상 옆에 친구가 되어주시고, 도정궁마님과의 인연으로 고궁도 안내하시고하더니 결국에는 돈암동 교당으로 안내를 하시기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사시화할머니의 정성과 적공은 돌이켜보면 큰 은혜였던것 같다.

그러던 중 사시화할머니는 우리를 동생집(성성원님댁)으로 안내하였는데 여기서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님을 뵙게 되었다.

 

육타원 종사님은 어머님께 " 절에 열심히 다니신다 들었는데 그곳에서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하고 물으시며 "내가 스스로 공부하여 부처를 이루어야 정법과 사교를 구분 할 줄 알게되고 서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불도 알아 보게 되는 것이니 속는 셈치고 불법연구회에 한번 다녀보시지요" 라 하시었다.

 

어머님께서는 육타원님의 고상한 자태와 따뜻하면서도 무게있는 언행 에 끌리신 듯 이때부터 마음이 움직이시게 되었다.

 

이후 어머님께서는 남원에 내려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이리역에서 내려 대종사님을 친견하시게 되었다. 대종사님께서 어머님에게 소원을 물으시매 어머님께서는 "서가모니 부처님을 못뵙고 영산회상에 참례치 못하였으니 돌아오는 용화회상의 미륵부처님을 뵙고 제자되기가 원이옵니다".

 

하시니 대종사님께서는 꼭 이루겠다 하시며 과거에 서가모니부처님을 모시었으니 부처님을 뵙고 싶고 영산회상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영산회상을 생각하게 된다 하시며 공부를 하면 다 알게 되고 미륵부처도 만나고 용화회상에서 공부도 하겠다 하시면서" 성현은 인지의 발달됨에 따라 그 시대에 맞게 법을 짠다" 하시고 서가모니부처님께서는 당대에 맞게 법을 짜시고, 미륵부처님은 그 시대와 인지의 발달됨을 따라 법을 짜게 되나니 사철을 따라 의복을 바꿔 입듯이, 즉 여름에 겨울 솜옷을 입으면 맞지 않듯이 법도 그 시대를 따라야 된다 하시고 불법의 요지, 불생불멸의 진리나 인과보응의 진리는 여여하여 변함이 없으나 중생제도의 방편은 그 시대를 따라가야 하는 것으로 절에 가서 만들어 놓은 부처님께 죄복을 빌며 절만하면 중생제도가 되겠느냐고 반문하시고 자녀들도 절에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잘 드리느냐고 물으시니 어머님께서는 이때 한 생각을 얻으시고 참으로 새 부처님이 앞에 계심을 알아뵙고 그 자리에서 자녀 사남매 며느리, 사위 모두를 입교시키고 의무금도 내시어 이때 나도 입교하게 된 것이다.

 

원기 21(병자년) 겨울 동선에 어머님께서 참여하시기로 하시자 나도 따라 나서서 선을 나며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때 들은 법문으로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안다. 최령의 사람은 제 자식만이 아닌 세계인류의 모든자식을 사랑 할 줄 알아야 하거늘 하물며 동기 친척을 배척하고 제 식구 제 자식만을 사랑하면 동포의 배은자요 배은의 결과는 불목, 불화 즉 가정불화, 형제불화, 친척불화로 이어지게 된다.

 

앞으로는 은혜를 알아서 은혜를 갚는 대 보은 대 화합시대가 올 것이다. 또 자식도 무자력때는 부모가 보호해주는 의무가 있으나 자력을 얻어 한 사회인이 되면 사은에 보답하는 보은자가 되어야지 늘 부모의 덕을 보려함은 빚만지는 부모배은자라 하심에 나는 대종사님이 나의 마음을 꿰뚫고 나에게 하시는 말씀같이 느껴졌다.

 

나는 부모님께서 남들처럼 여학교도 안 보내주시고 양반가의 집안 생활속에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활동에 제약과 구속을 많이 받았기에 부모님게 원망심과 불만이 많았던 처지였다. 나는 감각감상의 일기를 쓰면서 이제까지 나의 삶을 되돌아보며 빚지고 살아온 생활을 참회하게 되었다. 일기를 쓰며 어찌 그리 눈물이 나는지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관음행선생이 효진이가 일기를 쓰면서 운다고 사뢴 즉 대종사님께서는 원망심이 녹아 진참회를 하는 해원의 순간이니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라 하셨단다. 몇 시간을 울고나니 내가 짓고 내가 받는 자업자득의 뜻을 알게되고 가슴이 후련해지면서 사은의 큰 은혜를 알게 해 주신 대종사님을 만난 기쁨이 가슴 가득해 지면서 학교공부 못한 한을 도학공부로 돌려 부처님의

 

참 제자가 되리라는 결심을 하고 대종사님께 전무출신의 서원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네가 불법연구회의 문을 닫게 하려 드느냐고 크게 꾸짖으시며 타이르 시기를 재가와 출가가 둘이 아니고 재가가 없으면 출가자가 누구를 제도하며 중생제도에도 재가공부인들이 있어 주인이 되어야 출가가 발을 붙이고 중생 제도를 한다 하시며 이왕 결혼한 몸이니 출가를 하여 불법연구회에 누를 끼치기 보다는 재가에서 출가의 뒷바침을 하라 하시고 부설거사의 법문을 들려주시며 우리교단은 재가 출가를 똑같이 공부와 사업의 평가를 하여 천여래 만보살의 대열에 오르게 할 것이라 하시었다.

 

나는 세속에 들면 공부심과 신심이 약해질까 걱정이 되어 대종사님께 은녀결의를 허락해 주실 것을 청원하였다. 대종사님께서는 '은부녀 결의를 맺여준 제자가 여럿 있으나 이 또한 누구를 은부녀 결의를 하고 누구는 안하느냐는 말이 있어 폐단이 되겠기에 끊었는데 끝으로 너 하나만 받겠으니 네가 막내다" 하시며 허락 하시어 부녀결의의 서원서를 바치게 되었다.

 

나는 이듬해(원기 22년 정축년)에도 동선에 참여하여 두번의 동선을 나면서 신심에 뿌리가 내렸다고 생각된다. 이해에는 형섭어머님의 회갑을 맞는 해로서 어머님게서는 회갑잔치를 마다하시고 대신 수양원을 지어 달라고 소원하시어 두 오라버니(영산님과 상산님)께서는 향교에 조그만 집을 지어드리니 이것이 남원교당의 시초가 되었고 상산님을 비롯하여 곤타원 박제권, 진타원 박제현, 혜타원 오희원 등 수 많은 박씨 문중에 전무출신이 이어지는 초석이 되었다고 하겠다.

 

 

나 또한 시댁으로 돌아와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생활속에 실천하면서 사시화 할머니를 오시도록하여 시어머님께 대종사님 법을 전하도록 하니 시어머님 께서는(예타원 김성덕)밝으신 혜명으로 대도정법을 알아보시고 입교하시고 이 후 자녀분들을 모두일원가족이 되도록 지도하셨다.

 

나는 이 모두가 박사시화 할머니의 지극한 정성과 적공으로 대종사님의 대도정법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신 노력의 결과라 여기고 있다. 누군가가 사시화할머님께 길가는사람 아무나 붙들고 입교하라 하신다며 많은 사람 입교시키기 보다는 교도노릇 할 만한 사람을 입교시키라고 말하니 사시화할머니 대답인즉 닭이 천마리면 그 중에 봉이 한마리가 있다 고 하셨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정형섭 어머님께 바친 열성과 정성으로 박씨 문중에 전무출신이 계속되고 시어머니 김성덕님의 연원으로 창평교당이 세워지고 보산 고문국님, 감산 고문기님 등 자제분들이 재가로서 중임을 다하고 있는 것이 사시화할머님 말씀에 대한 산 증인이요 표본이라 하겠다.

 

나는 그 공덕이 무량하시리라 믿는다. 인생이 고해라고 하지만 나는 대도정법에 입문한 이후 고 보다는 복락을 많이 누렸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식을 졸지에 잃어버리는 괴로움도 당했으나 대종사님 가르침대로 지어논 업보로 생각하며 슬기롭게 극복 할 수 있었고, 소소한 괴로움들 역시 흘러가는 물처럼 탐진치에 끌려 지옥을 만들지 아니하고 시간나는대로 마음을 펼쳐놓고 염불 좌선 독경으로 청소하니 나의 사주팔자를 뜯어 고치게 해주신 대종사님의 은혜가 하해같음을 다시한번 느끼며 감사드리는 마음속에 보은을 다짐하게된다.

 

출처: 박용덕. 가마솥 공동체 자료발굴과 정리